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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어떻게 참여해야 할까?(제임스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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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강연  제임스 K. A. 스미스(캘빈 칼리지 철학과 교수)

번역  김진혁(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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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기독교적 정치 참여의 지형도 그리기

 

오늘 저녁 여러분에게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두 도시는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가 기록했던 것이 아니라, 5세기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가 그렸던 두 도시입니다. 즉 지상 도성과 천상 도성, 인간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저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의 정치적 소명(political vocations)을 통해 생각하게 하는 도구 세트’(toolkit), 즉 항구적이면서도 시대적인 틀 같은 것을 우리에게 제공한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최소한 제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설명을 풀어놓기 전에,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정부에 참여하는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가 던진 조언을 가지고 그 느낌을 맛볼 기회를 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마치 의회 안의 그리스도인의 고대 북아프리카 버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례로, 소동과 격변의 시기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의 장군이자 아프리카의 총독으로서 공직에 몸담았던 보니파키우스(Boniface)와 지속해서 주고받은 편지를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이 친밀한 서신 왕래를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보니파키우스의 영혼에 관심을 보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언제나 자기가 출발점으로 삼았던 곳, 즉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저는 간결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도와 선행으로 이 사랑 안에서 진보를 이루고”, 우리 마음에 널리 뿌려진 사랑의 충만함을 이루기를 권고합니다(서간 189.2).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일한 사랑이 보니파키우스 안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 사랑으로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이 매일 진보를 이룹니다. 죽어 사라질 존재의 왕국이 아니라 하늘 왕국에 들어갈 것을 갈망하면서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엄청난 권력을 가진 관료인 보니파키우스에게 자신이 섬기고 있는 제국을 넘어선 왕국에 대한 충성을 깨닫게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보니파키우스를 책망하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보니파키우스가 공직을 다 벗어 던지고 거룩한 한가로움”(holy leisure)으로 물러나려고 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지 못하도록 만류했습니다(서간 220). 당신은 소명(calling)이 있다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에게 도전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에게 권면했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는 당신과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부름받은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정치적 환경이 어렵고 부패했더라도 이러한 부름(calling)으로부터 보니파키우스를 면제시켜 주기에는 불충분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로마제국이 당신에게 선한 것들을 주었다고 합시다. 제국은 천상이 아니라 지상의 것이기에, 이 땅에 속해 있고 곧 사라져 없을 것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제국은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것만 줄 수 있습니다. 만약 제국이 당신에게 선한 것들을 수여했다면,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서간 220.8). 아우구스티누스는 보니파키우스로 하여금, 궁극적 희망이 다가올 도성에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이 지상 도성에 뭔가 빚진 것이 있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러나 아마 보니파키우스에게 건넨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견지명 중 가장 빛나는 말은 오늘 저녁 우리가 성찰할 내용의 핵심에 놓여있는 한 마디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이 노력함에 따라 천상의 왕국이 올 것처럼 보니파키우스가 흥분하며 자기 의지를 내세우려고 하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에게 주의를 줍니다. “성인과 의인과만 함께할 시간을 우리가 앞서 살기 원해서는 안 됩니다”(서간 189.5).

 

오늘 제가 기독교적 정치 참여의 지도의 일부를 보여 줄 수 있다면, 여러분은 아마 그것을 3D 지도 같은 것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두 도성과 맺는 관계 속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을지 자리 잡아 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거기 있을지를 정립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의 정치적 지혜는 장소 그리고 시간에 관한 성경적 지향성이고,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는 우리가 시간을 앞서 살려고할 때 잘못되게 됩니다. 시간을 앞서 살지 않기가 비변증적(unapologetic) 기독교 현실주의의 표어이고, 오늘 저녁 저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권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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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에있는가? 우리는 언제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정치 나침판(political compass)

 

이제 시간공간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소명을 생각해 봅니다. 현명한, 신중한, 신실한 공공신학이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계속되고 지속적인 헌신으로 활기를 띠면서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특별한 도전과 기회들로 조율되기도 합니다. 지금 저는 전략과 공식들이 아니라, 특정한 틀과 자세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중요한 두 핵심어를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1. ‘세속’(secular)은 영역(realm)이 아니라 시대(era)입니다. 현시대(saeculum)는 십자가와 다가오는 왕국 사이의 시간, 시절, 시대입니다. 시간은 평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현시대 안에 위치시킨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부활, 승천 이후에 살고 있으면서도 왕국의 도래 이전에 살고 있음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예컨대 우리가 다원주의(pluralism)를 기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심각한 불일치에도 충격을 받거나 분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또 다른 중요한 구분을 합니다.

2. 그 시대에 우리는 두 도시, 즉 지상 도성과 천상 도성의 뒤섞임(permixtum) 속에 살아갑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도성을 자기가 이 세상의 도성”, “지상 도성”, 인간의 도성이라고 여러 단어를 써서 불렀던 바와 구분합니다. 이러한 두 다른 도성, 사회,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기준에 의해 특징지어집니다. 지상 도성은 육의 기준으로 산다면, 하나님의 도성은 영으로 살아갑니다(신국론14.1-4). 둘을 궁극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그들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두 도성이 두 종류의 사랑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상 도성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데까지 이르는 자기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천상 도성은 자아를 경멸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하나님 사랑에 의해 창조되었다”(신국론14.28).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지상 도성은 창조가 아니라 타락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지상 도성은 창조와 동시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로부터 생겼습니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의 도성을 지상 도성과 대조하는 이유입니다. 두 도성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사랑에 의해 정의되고 움직입니다. 따라서 지상 도성을 단지 현세의도시 혹은 물리적 세계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지상 도성은 창조의 영토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지상 도성이란 창조된 삶(creaturely life)의 침투적(systemic)그리고 무질서한(disordered)배치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물질적문화적피조적 삶을 악한 이에게 완전히 양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성은 단지 내세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이 세계에 욕망하시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삶을 미리 맛보고 이를 체현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의 사회’, 즉 도시(civitas)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문화적 삶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동기를 부여하려고 지상 도성을 들먹이지 않습니다. 그 역할은 그의 창조 신학이 이미 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상 도성 분석은 문화적 시스템들이 종종 근본적으로 질서하다(dis-ordered)는 것을 그리스도인이 자각하도록 압박합니다. 이로써 기독교적 노력에서 나온 저항과 새로운 질서 지움이 모든 문화적 움직임에 필요하다는 경고를 던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편지에서 보았듯, 그는 스스로 이러한 일을 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정치와 시민적 삶(civic life)의 구체적 현실에 자신을 깊이 연루시킨 주교(bishop)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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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아우구스티누스가 현실을 천상적2층과 지상적1층으로 나누려고 지상 도성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지상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은 하늘 땅에 관해 서로 경쟁하는 전망(vision)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상 도성은 에덴동산이 아니라 바벨론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 도성의 근원적 대조는 거룩한 작전 회의(huddles)를 하도록 현실의 뒤로 물러나는 것을 용납하거나 단순히 지상 도시를 강하게 비판하거나 악마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조언하듯, (아우구스티누스의 전문 용어에 따르면) 자신들이 지상 도성에 유배되어 있음을 아는 하나님 도성의 시민들은 그 도성의 안녕을 구하도록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창조세계를 돌보라는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에 지상 도성을 잇대려 함으로써 지상 도성의 안녕을 구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창조된 삶을 샬롬으로 새롭게 질서 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도성의 이야기를 구별하는 것은 두 도성의 각각 다른 사랑, 혹은 그들이 사랑하는 다른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도시는 두 관할구역이나 관점이 아닙니다. 그러한 구분의 기원은 창조가 아니라 타락입니다. 그리고 지상 도성은 정치를 소유하지”(own) 않습니다. 정치 같은 것이 지상 도성에 구현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천상 도성은 또한 정치적(political)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이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정치 생활에 참여하는 데 어떤 차이를 만들까요?

 

1. 좌우 진영의 유토피아주의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적인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 시간을 앞서 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우리가 현시대(saeculum), 즉 그리스도의 통치가 충만히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치열한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왕국이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덫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준궁극적인 것(penultimate)을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 우리는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잊어버리게 될지 모릅니다. 종말론적 기대는 천상의 시민권에 있어 핵심적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는 한, 그 왕국이 아직은 여기에 없습니다. 이것은 왕국의 도래와 특정한 통치 형태나 정부 혹은 정당을 동일시하려는 어떠한 유혹도 약화합니다.

 

영국의 신학자 올리버 오도노반(Oliver O’Donova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사건(Christ-event)의 결과는 복음에 의한 정치의 탈신성화’(desacralization).” 우리가 지상에서 행하는 정치적 노력이 비록 정의를 위한 가장 진실한 노력일지라도, 그 노력은 왕국이 오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정치가 모든 것(everything)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승천하신 분을 왕으로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간 시대에서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정치적 정체성을 궁극적 정체성으로 여기려는 유혹에 사로잡혀선 안 됩니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확신이 궁극적인 것이 될 때, 시간적인 것을 절대화하려는 경향이 가장 강해집니다. 이런 이유로 세속화된 사회에서 정치가 모든 것인 양 다뤄지기 쉽고, 정치적 차이가 마치 궁극적 차이인 것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단지 나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특징지어서는 절대 안 될 위험천만한 상상력입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지 않으면서도 정의는 궁극적으로 왕과 함께 도래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여기에 맞춰 우리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거는 기대와 그들과 맺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물론 이러한 자세는 장차 올 샬롬과 연속선상에서 세계를 바로잡아 가는 일”(repairing the world)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움직입니다. 우리의 기대를 단련하는 것(tempering). 이로써 기독교 현실주의와 이제껏 상실했던 신실한 타협”(faithful compromise)의 기술이 생겨납니다.

 

2. 이 같은 태도는 섭리에 있어 불확정적인 역사적 결과대표적 예를 들자면 입헌 민주제, 개인의 자유와 존엄, 시장 경제 등분별하는 일의 중요성을 재평가합니다. 올리버 오도노반은 이것을 세상의 정치적 기관과 실천에 복음의 폭발이 남긴 분화구 자국”(crater marks of the Gospel)이라 불렀습니다.

예배는 파송(sending)으로 마무리되기에, 기독교 예배는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장소(enclave)에서 행해지는 의례(rites)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예배는 시장과 선거, 기업과 의회의 복도로 들어가는 것을 사명(missio)으로 삼는 파송된(sent) 사람들의 훈련장입니다. 창조와 새창조를 반복하는 기독교 예배에서 재연되는 내러티브는 창세기 1장과 마태복음 28장의 가라”(Go!)라는 명령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따라서 교회는 우리가 그곳으로 물러나야 할 대조 사회라기보다는, 거기로부터 우리가 파송을 받도록 새로이 중심을 잡는(re-centering) 실천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우리의 사회적 상상이 형성되는 상상력의 장소입니다. 즉 교회는 대안적 공간으로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분별(discernment)의 준비가 되도록 성령께서 교육하시는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분별이란 방어적인 것과는 근원적으로 거리가 있습니다. 분별은 우리를 안전순결함이라는 더 작고 작은 구석으로 밀어 넣으면서, 위협과 위험에 대해 바짝 경계하도록 몰아세우지 않습니다. 반대로 기독교 예배 속에서 우리의 사회적 상상은 능동적인 분별(active discernment)을 갖추게 됩니다. 이는 현시대(saeculum)라는 더 광범위한 경쟁적 공간들 속에서 참여와 협동, 비판의 기회를 보게 해 주는 적극적인 지혜와 신중함입니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이것이 바로 시간과 역사를 제대로 인식할 때 차이가 만들어지는 이유입니다. 지상 도성의 중심에서 선교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몸인 파송된 교회는 현재 당면한 여러 도전과 구체적인 정책안과 의회의 실제 정치적 환경 등의 상황을 고려하며, 시간에 우리의 장소에서 신실한 정치적 현존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상황화된(contextualized) 사역을 하도록 특별히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분이 역사에 움푹 들어간 자국을 남기셨다는 것을 인식하며 시간 속에서 우리가 분별의 작업을 할 때, 지상 도상에서 우리의 정치적 실천과 제도가 복음과 만난 자국을 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올리버 오도노반은 다음과 같이 도발적으로 말합니다. “우주로부터 온 폭격으로 곳곳이 분화구처럼 움푹 파인 행성의 표면처럼 지난 시대의 정부들은 동이 트듯 밝아오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DN, p. 212).

 

하나의 첨예한 사례를 들어 봅시다. 우리는 단순히 자유민주주의(혹은 자유주의그 자체)의 실천이나 제도들을 악마시할 수 없습니다. 비록 이들이 질서를 잃고, 심지어 우리를 타락시키는 데 일조하더라도, 다른 면에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역사와 창조에 끼친 영향력의 유산입니다. 일례로 개인의 존엄과 자유는 우리의 공적 제도 속에 울리는 복음의 반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이상 인간 사회의 권위를 최종적이며 불투명한 것으로 취급할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를 행하셨다. 그분은 기름부음을 받으신 이를 보내 지배하게 하셨으며, 그분이 나타나신 곳마다요단 강변의 세례 요한에게, 가버나움의 병자에게, 그분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에게그분은 기존 권위의 주장을 해체하고, 그것들을 겸손하게 하여 그분의 사랑의 법의 통제 아래 두셨다”(DN, p. 253). 아니면 심판하시고 용서하시는 분으로 예수의 실재(reality)인 복음이 어떻게 여러 사법제도를 변혁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적 자유주의에서는 재판관들에게 자신들과 같은 처지인 죄인들의 범죄에 대해 판결을 내릴 때 어깨 너머를 바라보라고 가르쳤다. 그들 역시 자비롭게 심판하는 이 들을 자비롭게 심판하실 하나님의 더 높은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가르쳤다”(DN, p.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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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기다리며가 북미적 문맥에서 쓰인 책임을 인정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인 저를 상당히 흥미롭게 만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양극화된 문화에서 당파정치의 디폴트 상태로 그리스도인이 맞춰지는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1) 우리는 정치와 공적 삶의 예전적 본성을 놓치고 있습니다. 공적 삶의 리듬과 의식(rituals)은 단지 우리가 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이들이 우리에게 뭔가를 합니다. “기독교 세계관과 변혁을 위한 무장(武裝, marching order)을 갖춘 우리가 자신 있게 걸치고 있는 공적 삶은 중립적 공간이 아닙니다. 공적 삶은 우리의 확신을 우회하고 우리의 정서를 징집하는 의식과 예전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나쁜 생각에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무질서한 예전 때문에 회심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두가 정치적 우상숭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2) 우리는 교회의 정치적 본성을 놓치고 있습니다.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의 도성의 시민윤리(civics)입니다. 역사적인 기독교 예배의 실천과 훈련은 복음화된 사회적 상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우리가 잠김으로써 붙잡게된 샬롬, 번영, 정의의 성경적 비전을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비록 우리의 직관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저는 기독교의 정치적 증언을 되살리는 것은 교회를 되살리는 데서 비롯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공적 삶을 새롭게 하고 구제하는 데 기여할 시민, 정치인, 공무원의 형성은 교회를 새롭게 하고 우리의 예배를 개혁(reform)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회중은 성경적으로 삼투되고 그리스도로 가득한 상상력의 장소가 됩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창조를 보살피고, 연약한 이를 보호하는 제도를 만들도록 보냄을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의 윤리(civics)로 새롭게 형성되고(re-formed) 새롭게 질서 잡힌(re-ordered) 사랑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왕을 기다리는 중간 시대에 지상 도성 시민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우리가 어떻게 공공의 삶으로 신중하게 나가게 되는지 알게 될지 모릅니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던 대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또 그분의 오심을 어떻게 기다릴지를 배울 때,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현시대”(saeculum), 즉 십자가와 왕국의 도래 사이의 바로 이 시간의 공적 삶을 특징짓는 신실한 타협이라는 복잡한 과업에 준비가 더 잘될 수 있을 겁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에겐 기독교적인 정치가 아니라 더 기독교적인 정치가 필요합니다. , 저도 이 말이 미친 소리처럼 들린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파송되기 위해 형성됩니다. 사명의 외적 활동(outworking of mission)은 언제나 지역적입니다. 만약 우리의 교회적 정체성이 국경을 초월한다면, 우리 인간의 유한함은 국가, , , 지역의 구체성 안에 우리를 위치시킵니다. 이와 다른 식으로 하려는 것은 시간을 앞서 사는것입니다.

우리의 정치적 소명은 이웃에게서 확고해집니다. 정치는 가능성의 기술이지만, 공공선을 위해 수행되어야 할 기술입니다. 이것은 여러 정치적 기구에 이웃 사랑을 부어 넣고자 기독교적 의무를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식으로 가시화될까요. 취약한 이웃을 보살피는 최상의 방법으로 제도들을 만들고, 유지하고, 개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이 같은 제도들이 약화하고, 또한 이러한 제도들에 대한 우리의 공동 투자가 약화할 때 더 긴급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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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지금 시간을 상기하면서 강의를 끝맺을까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교회력에서 중요한 순간을 생각하십시오. 교회력은 절기에 따라 기억하게 함으로써 이 실재(reality)를 해마다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교회력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그리스도 왕 축일(feast of Christ the King)을 우리가 지키고 나면, 바로 그다음 일요일에 대강절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왕 축일은 상처를 안고 왕좌에 오르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왕이시라면, 어떤 의미에서 모든 지상의 통치자는 이미 권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단지 중간 시대에 관리인(steward)일 뿐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명령을 할 수 없습니다. 왕 되신 예수께서 여러분 머리에 머리카락 수까지 아실 때, 당신은 어떤 집단주의적 기계의 한 부품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올리버 오도노반은 이것을 복음에 의한 정치의 탈신성화라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대강절은 우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 배우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수동적인 정적주의나 펠라기우스적인 행동주의가 아닌, 희망이 담뿍 담긴 신뢰 속에서 기다리는 일 말입니다. 왕국은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지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는 한, 우리는 왕국이 도달하지 않았음을 압니다. 대강절의 인내(Advent patience)를 실행하는 것은 시간을 앞서 살려고하는 기독교적 유혹에 저항하게 합니다. 대강절의 인내는 이러한 기다림을 망각하게 하는 우파의 신율주의(right-wing theonomies), 즉 왕국의 도래가 우리에게 달려 있고 그렇기에 우리는 왕국이 오도록 투쟁해야 한다는 실천적 후천년설(practical postmillennialism)을 거부합니다. 마찬가지로 대강절의 인내는 정의를 우리 손에 달린 사회 개선 프로젝트로 환원하는 좌파 유토피아주의로 특징지어지는 실천적 후천년설도 거부합니다. 두 입장 모두 왕 되신 그리스도를 재현하는 사람들의 십자가로 빚어진 삶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도의 실재와 대강절의 기다림 속에서 사는 데 실패하고 맙니다. 교회의 삶의 리듬은 이러한 성경적 상상력 속에 우리를 새겨 넣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어떻게 파송될지를 빚어냅니다.

 

천상 시민들은 지금의 시간이 언제인지 압니다. 우리는 오시는 왕을 기다리는 중이고, 우리의 기대는 이 같은 종말론으로 훈련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피조물인] 인간의 소명, 즉 정치적인 자각을 하도록 창조 세계가 부르는 소리에 반응해야 하는 소명(calling)에서 우리를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창조 세계의 본성 자체가 정치적 조직체들을 창조하는 문화적 과업을 요구합니다. 십자가, 부활, 새창조는 이러한 소명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갱신합니다. 특별히, 십자가, 부활, 새창조는 그 소명을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취약한 이들을 보호하는 정치 기구와 정책 그리고 조직과 제도를 형성하라는 소명으로 재구성합니다. 이는 상업과 교육, 예술, 심지어 우리의 놀이에 관한 인간의 여러 직업을(callings) 추구하면서도, 우리 가운데 과부와 고아, 나그네를 살피도록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동의 삶을 살면서, 치열하면서도 선한 공간인 뒤섞임(permixtum)에 참여하고 함께 힘을 모읍니다. 지상 도성이 하나님의 도성을 향해 조금이나마 기울어지도록 희망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그 속에 참여하고 협동합니다.

 

기독교적 정치 참여는 담대하지만 신중하고, 잘 조율되었지만 희망에 차 있고, 십자가로 빚어지지만 왕국을 향해 기울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사역이 다음의 두 희망찬 권고의 운율로 생기를 머금기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을 높이 드십시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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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K. A. 스미스
 

제임스 K. A. 스미스(James K. A. Smith)

오늘날 기독교 진영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 및 저술 활동을 펼치는 기독교 철학자다. 오순절 전통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개혁주의 전통 및 현대 프랑스 철학을 연구했다. 캐나다 기독교학문연구소에서 제임스 올타이스의 지도 아래 철학적 신학을 공부하고, 빌라노바 대학교에서 존 카푸토의 지도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현재 캘빈 칼리지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근대성의 세속화 문제를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아우구스티누스를 현대적으로 전유하는 ‘급진정통주의’를 수용하여 현대 사회 및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문화 비평을 전개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왕을 기다리며』(이상 IVP), 『습관이 영성이다』 (비아토르),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살림출판사), 『급진정통주의 신학』(기독교문서선교회), 『칼빈주의와 사랑에 빠진 젊은이에게 보내는 편지』(새물결플러스), 『해석의 타락』 (대장간), After Modernity?: Secularity, Globalization, and the Reenchantment of the World, Jacques Derrida: Live Theory, How (Not) to Be Secular: Reading Charles Taylor, Who’s Afraid of Relativism?: Community, Contingency, and Creaturehood 등의 책을 썼고,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 타임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이 글은 “IVP x 비아토르가 함께하는 제임스 스미스 초청 강연을 위해 저자가 제공한 The Tale of Two Cities를 한국어로 옮긴 글입니다. 인용, 유포 등 이 글의 내용을 활용하는 일은 저자의 허가를 받아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IVP 편집부(ivped@ivp.co.)kr에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IVP 2019-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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