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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쌓아 올리는 예배(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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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글  김영환 

책 『오늘이라는 예배』 티시 해리슨 워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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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오늘은 여전히, 아직도 버겁다

 

 

매일의 삶, 싱크대에 쌓인 그릇, 같은 질문을 하고 같은 이야기를 또 해 달라고 조르는 아이들, 오후의 긴 우울함 같은 것들은 반복으로 채워진다. (52)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오늘은 많은 경우 생생함과 기대, 설렘이 아닌 긴장과 두려움, 버거움으로, 심지어 단조로움, 지겨움, 권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오늘은 마치 밀려오는 파도와 같이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이 반복된다. 반복되는 파도에 익숙해지듯 나도 오늘이라는 일상에 익숙해져 갈 뿐이다. 일상에 익숙해질 때쯤 깊은 아픔이 찾아와 때때로 아픔에 무뎌지길, 아픔이 잊히기를 기도하기도 한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이라는 나름의 훌륭한 해석 체계를 통해 이러한 일상의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겠으나 이 모든 파도를 받아 내기에는 부족하다. 그리하여 일요일 강대상에서 울려 퍼지는 설득력 있는 설교는 월요일이라는 문 너머의 아프고 익숙한 파도에 휩쓸려 나간다. ‘삶의 자리에서 드리는 예배’, ‘예배자로 살아가는 삶같은 메시지는 도저히 끝낼 수 없는 숙제로 남아 있다. 신앙생활이란 이렇게 다루기 어려운 일상’, ‘오늘을 어떻게 마주하고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워런은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평범한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가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사는가다”(34).

 

일상에 관한 신앙적 관점은 대체로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뉜다. 교회의 신학적, 신앙적 배경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먼저는 지식에 호소하는 입장으로, 엄밀하고 완성도 있는 신앙고백을 만들어 가는 것을 중심으로 삶에서 신앙고백을 실천하도록 촉구한다. 신자의 일상은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초하여 하나님에 대한 송영이 펼쳐지는 무대이며 영원한 즐거움은 송영의 부산물이자 신자의 유익이다


다음으로는 지식보다는 실천에 호소하는 입장으로, 직관적인 체험과 선행(사랑)을 강조한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최대의 사랑이자 믿음의 반응으로서 복음전파(전도)를 삶의 중심에 둔다. 공동체에 다양한 간증과 기도가 넘쳐 나며 교육은 주로 복음 전파를 염두에 둔 프로그램들이 진행된다. 신자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인 복음 전파를 통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자신의 일상에 채우도록 요구받는다. 두 입장 중 전자는 일상을 해석할 수 있는 탄탄한 해석 체계를 갖고 있지만 체계를 벗어나는 일상의 당혹스러움을 감당할 만한 유연성은 부족하다. 반대로 후자는 감정적 호소, 결단을 통해 일상의 당혹스러움을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해석 체계에 다소 비약이 있으며 그 토대도 전자에 비하면 약한 게 사실이다.

 

워런은 일상에 대한 앞의 관점들과는 다른 문제의식, 방향을 가지고 접근한다. 그는 일상에 대한 문제를 인지적, 감정적 차원을 넘어 감각적 주제로 다룬다. 필자는 워런의 제안이 보잘것없고 진부한 작은 일상의 순간들에 깊은 의미를 새겨 넣어 오늘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먼저 워런의 근원적 문제의식인 몸의 중요성과 그것의 역사적 맥락을 다루고 저자가 말하는 체화된 예전이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워런의 내러티브 스타일을 따라 일상의 다양한 순간들이 예전(예배)과 조화를 이루는 절묘한 장면들에 집중하여 책 전체를 요약할 것이다. 키워드는 습관이며 그 습관으로 일상의 작은 행동들에 의미가 쌓인다는 것이 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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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적 신앙을 넘어 몸의 신앙으로

 

은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몸은 종종 영혼, 정신과 대비되는데 워런이 말하는 몸은 인지적, 정신적 한계를 넘어서며 또한 그 기초에 서 있다. 다음의 사건을 통해 신학교 시절 책과 토론에 파묻혀 지내던 워런이 마주하게 된 문제의식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는 중증 장애가 있는 딸을 둔 한 가족을 만났다. 그 딸은 말을 하지 못했고, 우리가 아는 한 그녀의 두뇌는 생각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 어린 소녀가 신앙 안에서 자라 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나는 궁금했다. ‘이 아이는 어떤 방식으로 예배할 수 있을까?’ 나는 단순히 인지적 신앙, 지적으로 바르게 믿는 신앙을 넘어서는 신앙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63-64)

 

워런의 화두는 다음의 결론으로 이어진다교리, 엄밀한 지적 추구는 신학과 신앙의 기본 요소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이 완성되지 않는다. 일정 수준의 인지적 능력이 요구되는 설교와 각종 교육 프로그램이 지닌 넓은 그물망에 작은 문제는 걸려들지 않는다. 실상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 일상’, ‘오늘에는 무지막지한 신학적 난제들이 자리 잡을 만한 공간이 그리 많지 않다. 삶의 목적, 고난의 이유와 같은 거대 담론은 잠시 제쳐 두고 잠에서 깨어나 시계를 보며 급하게 이를 닦고 헐레벌떡 지하철에 올라타는 것이, 업무에 시달리고 갖은 이유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집으로 돌아와 쓰러져 잠을 청하는 것이 우리의 오늘이기 때문이다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는 감각은 최소한의 인지 능력이나 학습 조건도 필요하지 않은 감각의 최전선이다. ‘은 성별과 연령에 제한을 두지 않고 경험의 기초를 제공한다.

 

워런이 강조하는 의 중요성은 교회와 신학의 역사에서는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온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육체와 영혼의 대결은 기독교 사상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다. 플로티노스(Plotinos)로부터 영향을 받은 수많은 고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큰 틀에서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간주하여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의 육체적 고난과 몸의 부활을 부정했다. 이들의 사상적 동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였음에도 그 결과는 교부들의 반박과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등 공의회를 통한 이단 정죄였다. 이 이면에 숨겨진 정치적 맥락은 잠시 미뤄 두더라도 (말 그대로) 유혈이 낭자한 대결 속에서도 한 가지, ‘육체를 지켜 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워런은 이러한 대결이 끝나지 않았으며 오늘날 신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한다. 육체를 부정하다고 여기는 모든 잔존한 유혹은 몸에 대한 영원한 보증인 성육신사건에 기대어 뿌리쳐 내야 한다.


물론 에 대한 워런의 제안들은 그리 새롭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매 주일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통해 몸의 부활을 고백하고 이 중요하다는 것을 숱하게 들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말하고 들어 왔음에도 이 갖는 신앙적 의의, 몸으로 하는 신앙생활에 익숙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몸의 신앙을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것과 실제 실천을 통해 습관을 형성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워런은 인지적 신앙을 몸의 신앙으로 체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을 해결하는 열쇠라고 말한다. 몸은 ‘오늘을 해석하고, 받아 내고, 살아 내기 위한 출발점이다.


 

그 대신, 아무리 평범할지라도 우리의 몸을 돌보는 이 작은 임무는, 신비하게도 육신이 되신 우리의 창조주께서 우리의 몸을 훌륭하게 만드셨고, 세포와 근육과 조직과 치아 안에서, 또 그것들을 통해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체화된 고백으로서 행해진다. (63)

 

워런이 말하는 예전의 체화와 실천”(67)이란 오늘이라는 최소 단위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여러 부분을 마치 주일날 드려지는 예전(예배)과 같은 옷을 입혀 그 작은 실천을 습관처럼 몸에 익히는 것을 말한다. 몸이 수행해 오던 보잘것없고 지겨운 기존의 습관들은 새로운 의미를 덧입어 소망을 향한 우리의 몸부림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몸은 예전이라는 의미의 옷을 입고 일상 안의 모든 요소를 새롭게 바꾸어 나간다. 그 결과 워런은 평범하고 지루한 이 닦기를 이토록 아름다운 예전(예배)의 현장으로 제시한다.


 

그렇기에 이 닦기는 비언어적 기도, 장차 올 소망을 붙드는 예배의 행위다. 영광의 작은 맛보기인 민트 향 나는 내 숨결.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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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쌓기: 습관에 대하여


워런의 글을 읽고 있자면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하나의 에피소드 안에 다양한 스토리가 담겨 각각의 장면마다 자연스레 화면이 전환되듯 워런의 펜은 일상과 예전(예배)을 넘나들며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 마치 내레이션 같은 그의 묵상들은 일상과 예전이라는 각기 다른 형태의 직물을 직조하여 독자들 앞에 값비싼 결과물로 내놓는다. 서문부터 마지막 장까지 이러한 교차 서술을 통하여 일상에 스며든 기존의 습관들을 걷어 내고 예전(예배)이라는 새로운 습관들을 채워 넣는다. 교차 서술이 거듭될수록 예전(예배)의 의미들이 일상에 쌓여 신자들은 차마 자신의 습관들을 돌아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반복적인 교차 서술을 통한 의미 쌓기으로 글이 진행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습관으로 넘어가 보자.


 

1) 습관 마주하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 하루의 시작을 스마트폰으로 맞이하는 습관(1). 작은 일에도 이유 없이 짜증과 화를 내는 습관(4). 내 앞에 놓인 음식이 너무 당연하여 여기에 어떠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생각되는 상황(5). 내 옆에 함께하는 사람에게 습관적으로 분노하는 불화의 습관(6). 자연스레 일을 미루거나 반대로 끊임없는 생산 욕구를 당연하게 여겨 일중독에 빠지는 습관(7). 조급한 마음에 차량의 경적을 울리거나 신호를 위반하는 습관(8). ‘조금 더라는 더욱 큰 쾌락 앞에서 멈추지 못하는 습관(10). 오늘을 즐기고 싶은 욕망으로 잠을 미루고 내일을 담보로 삼는 습관(11). 이러한 습관들은 습관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 생겨난 순간적인 결단이나 행동이 아닌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몸의 기억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자신의 습관을 누구보다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알더라도 마주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워런은 끊임없이 그 습관을 정면으로 마주하길 요구한다.

 

그러나 나의 습관은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내가 무엇에 가치를 두는지 드러내고 형성한다. 내가 그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말이다. (220)

 

하지만 습관을 마주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습관은 대부분 익숙하고 진부해서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익숙함과 진부함 속에 자신의 지향과 선호가 깊게 스며 있다. 습관은 검증이 필요 없는 이해의 과정이기에 즉각적이고 직관적이다. 생각도 않고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습관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많은 습관이 있다.

 


2) 습관 깨트리기


기존의 습관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습관이 필요하다. 습관의 자리에 다른 습관을 밀어 넣는 것이다. 습관의 교체에는 꽤나 큰 고통이 뒤따른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습관 이전에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마주해야 하며 매일의 습관적 분노 앞에서 내가 길을 잃었고 깨어진 존재임”(86)을 뼈저리게 마주해야 한다. 몸에 형성된 습관을 발견하고 그것을 마주하는 일은 자신을 벌거벗겨 세우는 일이다. 자신을 객관화하여 하나의 대상으로 거짓 없이 마주하는 일을 시작해야만 기존의 습관을 걷어 낼 수 있다. 그제야 단조로운 일상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습관을 키우고 있었던”(84)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절망하지 않고 살아 낼지”(85)에 대한 문제는 그 다음이다.


새로운 습관은 끈질긴 성실함으로 만들어진다. 워런의 주장처럼 끊임없이 나의 일상에 예전(예배)의 의미를 쌓고 또 쌓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오용과 남용을 일삼는 육체의 타락성에 맞서 싸우며’(73) 일상과 예전을 결합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예전(예배)과 그 의미를 극대화시키는 풍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예배는 심오하게 감각적인 경험이자 즐거움과 기쁨을 위한 훈련의 기반”(203)이다. 이러한 훈련의 기반 위에 설 때에만 일상 속 의미의 기초가 견고해진다.  예로 워런은 일상의 즐거움에 대해 G. K. 체스터턴(Chesterton)을 인용하며 어린이와 하나님의 유사한 모습을 상상한다. “아이들은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지겨워하지 않는다. 마음껏 즐거워한다”(202). 하나님도 이와 같이 매일같이 뜨고 지는 해와 달을 보며 커다란 기쁨을 느끼실 것이며 우리의 반복된 일상 또한 동일한 이유로 기뻐 즐거이 여기실 것이다(202-203). 예배를 통한 끊임없는 훈련과 그에 따른 풍성한 상상력으로, 깊게 박혀 있던 기존의 습관은 아름다운 감각 가운데 펼쳐지는 수많은 의미들로 대체된다.

 


맺으며: 꽤나 아픈 책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상은 결코 쉽지 않다. 워런의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나의 습관들을 반추하며 깊은 감동과 은혜를 체험하지만 동시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불경한 생각도 스친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자유가 아니라 계속되는 요구와 억압은 아닐까. 한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는 지긋지긋한 죄책감의 굴레를 벗어 버리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꽤나 아프게 다가온다. 이런 나에게 워런은 무슨 말을 건넬지 생각해 본다. 습관을 깨 나가는 고통과 새로운 의미를 찾아 맛보는 즐거움 사이의 긴장에서 복잡한 생각일랑 잠시 접어 두고 싱그러운 차 한 잔을 제안하지는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공동체에서 여럿이 모여 함께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듯하다. 수도원의 수사들이 공동생활을 하며 서로를 지키듯 우리의 훈련도 사랑하는 지체와 함께라면 숱한 어려움을 이겨 낼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김영환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성공회 교인이며 성직 지망자의 길을 걷고 있다.


IVP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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