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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형성에 대한 건설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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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정치학> 서론 / 스탠리 하우어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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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킨타이어의 기포드 강연, “도덕적 탐구의 세 가지 경쟁 이론: 백과사전, 계보, 전통에서 그가 묘사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 그는 강연을 장르로 사용함으로써 계몽주의 전제들에 반대하는 논지를 펼치는 시도 자체가 형식과 내용의 부조화이자,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우리가 말하지 못하게 막거나 우리가 말하는 것을 누군가가 듣지 못하게 막기 위한 목적으로 훌륭하게 설계된 형식에 넘겨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강연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합리적 양식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며, 합리적 양식은 매킨타이어가 무너뜨리려고 하는 계몽주의의 합리적 전제들의 특징이다.

 

이 책에서 나는 매킨타이어와 동일한 문제에 직면해 있을 뿐 아니라,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에 놓여 있을 수 있다. 나는 기독교 담론이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인에 의해 그리스도인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로서 이 책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교회의 실천 내부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해야 하는 한편, 양쪽 모두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책의 주요 특징인 교회의 중요성을 인식하라는 요청을 위해 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뒤로 물러설 필요는 없다. 오히려 교회나 나 자신이 처해 있다고 내가 믿는 어색한 입장에서, 우리는 자유주의 사회가 추정하는 보편성과 세계주의에 도전함으로써 그 사회에 공헌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목적

 

이 책은 기독교 신념의 힘과 진리성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자유주의의 지적·정치적 전제에 도전한다. 간단히 말해, 나는 기독교가 토대주의 인식론 즉, 칸트(Kant) 같은 사상가에게서 전형적 예를 찾을 수 있는 종류의 입장을 고수한 것이 기독교 세계의 사회적 전략에 상응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사회적 전략은, 일반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믿을 만한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였다. 뜻밖에도 이러한 전략은 기독교를 자유주의의 그릇된 보편론을 정당화하는 일련의 믿음 체계로 바꾸어 버렸다. 이 책에서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확증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실천의 구현으로서 교회가 중요함을 재확인함으로써 그 전략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런 주장에서 그렇게 급진적일 게 무엇이 있느냐고 의아해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교회 사이에 분명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사실 아닌가. 그러나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이 연관이 단지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 관계라는 것, 즉 교회 바깥에는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을 주변 사회와 긴장 관계에 빠지게 할 수 있음을 알기에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을 주장이다. 이 책이 그 유일한 목적을 잘 달성한다면, 기독교 신념이 진리냐 거짓이냐 하는 문제는 교회가 자신의 사회적·정치적 입장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분리될 수 없음이 분명해질 것이다.

 

나는 내 입장을 신앙주의적 그리고/또는 종파주의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식의 규정이 내가 도전하는 인식론적·사회적 입장을 전제한다는 사실 역시 그러한 비판을 잠재우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내가 시도하는 바를 명확하게 하는 것을 도와줄 또 다른 기지를 사용하려고 한다.

 

드 세르토의 구분을 활용하여, 나는 교회를 전략이 아닌 전술로 생각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의 전반적 입장에 그토록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이유가 바로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예를 들면,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은 대개 배타적이라고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주장을 그런 식으로 듣는 것은 교회를 전략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이 주장을 그런 식으로 듣는 것은 교회가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을 교회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일련의 콘스탄티누스주의적 가정을 계속해서 전제한다. 그러나 나는 교회가 신실하다면 낯설거나 이질적인 땅에서도 언제나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

 

바로 그것이 내가, 사회참여에서 교회가 물러나는 것에 대한 정당화를 이상하게 여기는 이유다. 교회가 어쩔 수 없이 언제나 포위당해 있어야 한다면, 어떻게 물러나는 것이 가능한가? 교회에겐 물러날 수 있는 곳이 없다. 나는 교회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콘스탄티누스주의적 권력에 대한 가정을, 특히 자유주의 보편론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가정을 포기하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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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콘스탄티누스주의는 버리기 힘든 습관이다. 계속 권력을 쥐고있음으로써 아주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 특히 그렇다. 이 습관을 버리기 힘든 것은, 서구 문명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은 교회의 위상에 의해 우리의 모든 범주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기독교 신학 좌우 진영 모두가 얼마나 자주 그러한 일련의 전제를 지속적으로 상정하는지 주목하라. 그리고 물론, 여기서 나는 정확하게 바로 그러한 전제들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오늘날 우리의 상황을 더 제대로 이해하고, 그러한 상황을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이끌도록 돕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쓴다. 과거 나의 많은 연구가 그런 것처럼, 이 책 역시 신학, 사회, 정치 이론과 고급문화 저널리즘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이상한 혼합물이다. 바로 이 점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의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고찰을 부차적으로 여기면서 신학을 할 수 있다고는 믿을 수가 없다. 조직신학이라는 생각 자체가, 처음에 교회를 교회되게 했던 본질을 저버린 헤게모니 권력을 쥔 교회의 결과물이다.

 

이 책의 첫 장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그토록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구원에 대한 이해를 재형성하려는 의도로 쓰였다. 교회 바깥에 구원이 없다는 주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의 의미에 대해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는 구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어떻게 교회의 사회적 위치를 통해 형성되었는지 보여 주고, 또한 콘스탄티누스의 타협에서 그 결정적 전환이 일어났음을 보여 주려 노력할 것이다. 분명히 그러한 타협의 일부였던 아우구스티누스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구원에 대한 그의 매우 정치적인 해석이 어떻게 세상에 대한 교회의 순응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돕는 자료가 되는지 보여 주고자 한다.

 

그다음 두 장은 내 학생들이 늪지 청소논쟁이라고 부르기 좋아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건설적이기 보다는 우리들의 삶에서 그 힘을 거의 알아채지 못할 만치 깊이 뿌리박혀 있는 전제들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의도가 있다. 정의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심지어 정의가 우리의 고찰에서 지닌 그런 우선권을 차지하는 것이 정말로 옳은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나는 우리의 상상력이 자유로워지기를, 그리하여 사회적 대안으로서 복음의 중요성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종교의 자유에 대한 장은 이 책의 기획에 처음부터 포함되지 않았던 유일한 부분이다. 나는 호주 사람들도 여전히 이 주제에 흥미를 갖기를 바라지만, 그곳에서 강연할 주제로는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에는 미국의 독자들을 위해 이 장을 포함했는데, 소위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4장은 이 책의 진짜 핵심이다. 거기서 나는 이 책의 근본 전제를 보여 줄 기독교 형성에 대해 건설적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흔히 우리의 통찰력에는 우리가 계속 나아갈 수단이 되는 개념 자원들이 결여되어 있다. 나는 벽돌쌓기를 배우고 퀼트를 배우고 정원 가꾸기를 배우는 일에, 그리고 어쩌면 심지어 글쓰기를 배우는 일에도 우리의 관심을 돌림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에게 빚을 지고 있음이 아마 이 부분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두 장은 4장에서 제시한 일종의 제안에 대해 구체적 설명을 제공하려는 의도로 쓰였다. 이 시대의 교회에서 성의 문제보다 더 지배적인 사안은 없다. 바라건대 나는 우리가 현재의 대안에 갇히지 않게 해 줄 방식으로 이 사안을 재개념화하려고 한다. 이상하게 들리기에 충분하지만, 나는 교회 앞에 놓인 가장 결정적인 정치적 과제 중 하나가 독신의 중요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로써 결혼이 다시금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로운 부르심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오늘날 교회에겐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교육에 관한 마지막 장은 교회에서 가장 논쟁적인 사안들 일부를 다룬다. 지식은 그 자체로 권력일 뿐 아니라, 종종 인식되지 않는 권력을 반영한다. 이 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자신의 교육 사업을 지속해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물론이고, 무엇을 지식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를 재구성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명확하게 보여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라는 주제를 고른 것은 호주에서 강연을 한다는 점을 의식했기 때문임을 고백한다. 내가 호주 원주민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는 호주 사람들이 나의 예를 그들 역사의 동일한 부분과 연결하여 재서술하는 데 아주 능숙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장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나의 이해에 도전하는 데이비드 툴의 글을 부록으로 싣고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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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도전으로 끝난다는 사실은, 내가 답을 알지 못한 채 이 책을 쓰고 있음을 가리킨다. 나는 그것이 많은 이들을 당황하게 만든다는 것을 아는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훌륭한 저자란 스스로 해결책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다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답이 적다는 사실에는 나 자신도 독자들만큼이나 자주 당황한다. 기독교를 전략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분석적 측면에서 대안을 제안하는 것은 내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에 대한 사그라들지 않는 나의 흥분만큼은 분명히 전해지기를 바란다. 존 밀뱅크는 특별한 책 신학과 사회이론에서, 기독교가 로마에게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신을 소개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끝나지 않는 전투의 수호자 유피테르 대신, 평화로운 기부의 행위 안에서 모든 유한한 실재를 발생시키시는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을 그분이 창조하신 존재들 사이에서 예배하고, 그분과의 새로운 사귐을 기뻐한다. 변화의 가능성 너머에 있는 천상의 도시에서 천사들과 성도들은 그러한 사귐 안에 거한다. , 그들의 덕은 저항과 지배의 덕이 아닌, 단순히 자기를 잊고 축제를 벌이는 상태에 머무는 일의 덕이다. 여기에는 오직 평화의 규정만이, 즉 자만과 지배의 죄로 물든 확신이 사회와 자연 모두를 죽음으로 이끄는 대립을 사방에 퍼뜨리기 전에 원래의 일시적 창조 세계에도 존재하던 그 상태만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진정한 어머니인 천상의 예루살렘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긍휼함 안에서 아래로 내려오셨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정치, 경제, 정신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그런즉 타락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사이의 일시적 간격인 세대에 속한 모든 구조로부터 해방을 의미해야 한다. 이 구원은 다른 종류의 공동체가 다르게 시작되는 형태로 드러난다. 지상의 도성은 형제 경쟁자를 이긴 정복자로부터 권력을 물려받는 반면, 이 세상을 순례하는 하나님의 도성은 권력의 승계가 아닌 살해된 형제, 즉 가인이 죽인 아벨에 대한 기억 위에 자신을 세운다. 사실 하나님의 도성은 역설, 유목 도시. 그 도성은 보기 좋은 모양새도, 성벽도, 문도 없기 때문이다. 그 도성은 로마처럼 외부의 적을 앞에 두고 피지배층에게 지배 계급이 제공하는 보호로 이루어진 도피처가 아니다. 사실, 이전의 이 피난처는 교회가 제공하는 진짜 피난처, 죄 용서의 흐릿한 원형에 지나지 않는다. 패자는 버리고 잠재적 경쟁자를 종속시키고 적에 저항함으로써 성취하는평화 대신, 교회는 모든 희생자에 대한 기억, 모든 시민에 대한 공평한 관심, 적에게 자신을 노출시키는 화해를 청하는 것을 통해 진정한 평화를 제공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살아 움직이게 만들고 싶은 비전이다. 이 비전을 살아 내는 우리가 되기를.


*<교회의 정치학> 서론을 편집한 글입니다.

IVP 2019-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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