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그리스도인』저자 인터뷰(전문)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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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내용은 8월 5일에 진행한 『순전한 그리스도인』저자 인터뷰 전체를 쓴 것입니다. 대체로 인터뷰를 그대로 옮겼으나, 대화를 진행하면서 나타났던 부자연스러운 흐름이나 표현은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약간 윤문하였습니다.
인터뷰이 김진혁 / 인터뷰어, 편집 설요한
요한 안녕하세요. 교수님. 간략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진혁 안녕하세요. 저는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김진혁이라고 합니다.
요한 조금 더, 학교에서 어떤 것 가르치고 계시는지, 또 관심분야가 있다면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진혁 학교에서는 조직신학을 주로 많이 가르치지만 기독교 윤리, 가끔은 철학, 박사과정생들을 위해서는 해석학을 가르치기도 하고, 요즘에는 신학입문과 글쓰기 수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요한 교수님께서 우리나라에서 활동하신 지 몇 년 되셨고, 그래서 인터뷰 같은 것도 찾아봤는데, 일단 교수님 인터뷰가 많이 없더라고요. 어쩌다가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는지, 또 어쩌다가 조직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가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많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어쩌다가 신학을, 또 어쩌다가 조직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나요?
진혁 진실을 알고 싶으신가요?
요한 아니 이게, 사실 질문 쓰면서도 이거 민감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해서.
진혁 그쵸. 왜냐면 저는 그렇게 거룩한 이유로 시작한 게 아니라….
요한 예기치 않게….
진혁 비판적인 이유로 시작했기 때문에….
요한 아…근데 사실 그것도 괜찮다면…모두가 엄청 목회적인 소명 가지고 신학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실존적 고민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꽤 많으니까요.
진혁 사실 신학과 지원하기 전에 우연히 신학책 몇 권을, 어려운 신학책은 아니고 M.Div. 학생들 읽을 정도 수준의 책을 고등학교 때, 그리고 그 이후에 조금 접했는데요. 그러면서 소위 말하는,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과 신학책 사이에 있는 약간의 불연속성을 보면서, 왜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에 차이가 있을까 하는 게 궁금해서 신학을 공부했다는 첫 번째 중요한 동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다 보니까 재밌어서 계속 하게 된 그런 케이스입니다.
요한 궁금했던 게 보통 조직신학 공부하신 분들이 쓰는, 물론 저도 아는 데 한계가 있긴 하지만, 보통 일반 조직신학 공부하신 분들이 쓰는 표현, 구사하는 신학과는 다른 뉘앙스가 (책에서) 많이 풍기는 것 같아서 그 배경이 궁금했거든요. 보도자료에도 썼지만, 문학을 굉장히 좋아하는 신학자, 이런 느낌을 많이 받아서 혹시 배경 중에 그런 부분이 있나 해서, 그런 배경을 독자 분들이 알면 좋겠다 싶어서 이런 질문을 던졌던 거고요.
진혁 문학은 전혀 없죠, 배경이.
요한 아, 그럼 가서 공부하다 개발된…알겠습니다. 이 책(『순전한 그리스도인』) 서문에서 루이스의 집에서 살았던 게 계기가 되어서 루이스 연구자들이 와서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고, 한국에 와서 루이스의 집에서 살았다는 게 계기가 되어서 루이스에 관한 강연을 하면서 루이스를 소개하게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그런데 루이스의 집에서 살았다고 해서 다 루이스를 연구하는 건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하다가 루이스를 연구하시게 된 건지, 혹은 실제 루이스를 처음 접했을 때 루이스에 대한 인상이 어땠는지 그와 관련해서 얘기해 주실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진혁 아마 루이스가 한국에 정식으로 소개된 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을 거예요 의외로. 실제로 2000년대 넘어서 정본이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루이스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저도 유학을 갔다고 할 수 있겠고요. 그런데 한국에서 루이스를 주로 소개하는 방식이 기독교 변증서 위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또 제가 기독교 변증에 그렇게까지 큰 관심을 기울이면서 신학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루이스의 중요성을 잘 몰랐고, 그런 상태로 계속해서 루이스에 대한 선입견 혹은 부족한 이해를 가지고 십여 년을 살았죠. 그러다가 우연히 루이스 집에 살게 됐고, 그러면서 (루이스 연구자들을 통해) 루이스에 대해 제대로 조금씩 배웠죠. 그분들이 좋은 멘토까지는 아니지만, 아니지, 멘토였다고 할 수도 있을까요? 아무튼 그분들께 배워 가면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죠.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오해를 가지고 살아 왔다는 게.
또 제가 관심 있게 공부했던 것 중 하나가 유럽에서 낭만주의 시대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종교적인 다양한 해석인데, 루이스도 상당히 낭만주의를 좋아했고 글에 낭만주의적인 정서가 많이 배어 있어요. 한국에서 그렇게 강조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제가 추구했던 낭만주의적인 성향이 있는, 혹은 그런 전제가 있는 기독교 내지는 신앙의 모습이 루이스에게서 나름 흥미롭게 재현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 이런 면이 있네?’ 하는 걸 발견하면서 루이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요. 또 그다음에 현실적인 이유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전공이 조직신학이었기 때문에 제가 받은 훈련은, 뭐 어찌됐건 조직신학을 하건 어떤 학문을 하건 완벽한 학문이란 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제일 좋은 공부법 중 하나는 한 사람의 작품을, 가능한 한 대가, 훌륭한 신학자의 작품을 거의 다 읽어 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거나 인간의 삶을 보는 눈을 기르거나, 아니면 신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배우고 그것을 통해 자기의 신학을 만들어 가는 건데, 정작 이제 한국에 와서 신학을 가르치는 입장에 처하게 되다 보니까 쓸 만한 책이 많지 않았던 거죠. 전체적으로 다 번역이 되어 있고 번역의 질이 상대적으로 고르게 잘된, 그렇게 번역되어 있는 사상가가 없었는데 루이스 같은 경우는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번역자들이 좋은 번역을, 거의 모든 작품을 해 놓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루이스가 아닐까 하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요한 그럼 본격적으로 책으로 들어가서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순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에서 ‘순전한’이라는 표현도 그렇고, 앞의 도입부에서도 아예 ‘순전하다’라는 표현을 의식하고 계신 것으로 보이는데, ‘순전하다’라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영어로는 mere겠지만, 한글 표현 ‘순전하다’, 한국어로만 보면 한국어 뜻인 순수함 혹은 완전함 혹은 원형 등의 의미가 다가올 것 같은데, ‘순전하다’를 어떤 의미로 독자들이 이해했으면 좋겠는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혁 제가 번역자는 아니지만, 번역자가 Mere Christianity라는 작품을 보고 엄청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mere라는 표현을 어떻게 한국어로 옮길까 싶은 거죠. 사실 루이스 같은 경우도 처음부터 Mere Christianity라는 제목으로 책을 쓴 건 아니었잖아요. 원래 썼던 글들을 모은 이후, 이미 베스트셀러가 된 소책자 세 권을 다시 모아서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라는 이름을 붙여 만들었기 때문에, 제가 볼 때는 이 형용사 mere를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루이스와 루이스의 그 책을 이해하는 데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알지 모르겠지만, 순전한 기독교가 원래 예전에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번역되었을 때 전혀 다른 제목으로 나왔거든요. “내가 아는 기독교”였나?(『내가 믿는 기독교』) 뭐 이런 식으로 번역되었거든요. 그리고 홍성사에서 정식 번역본이 나오기 전에, 그 이전에도 나왔던 번역본(은성출판사 판인 듯) 제목에서 제가 알기로 순전한 기독교라는 이 번역어가 등장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순전한’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모호함. 많이 들어 본, 영어로 봤을 때도 많이 들어 본 것 같은데 과연 이게 무슨 뜻일까 하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게 이 단어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말하고 싶고요.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나는 잘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잘 모르고 있는 게 기독교 신앙일 수도 있는데, mere가 가지고 있는 특징은, 내가 잘 아는 단어인데 그 뜻이 뭘까, 내가 잘 알고 있는 기독교인데 그 의미가 뭘까 하는 식으로 사람들의 심리에 작용하는 방식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하셨듯이, ‘순전한’이라고 했을 때 한국어로는 ‘순수’와 ‘완전’이라는 뜻이 합쳐져 있는데, 영어로 봤을 때는 ‘아주 심플하다’라는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과장되지 않고 담백하게 되었다는 의미도 들어 있죠. 그렇기 때문에 ‘순전한’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많은 해석, 너무나도 많은 적용, 너무나도 많은 역사적 발전의 궤적, 이런 것들로 가려져 있었던 기독교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기본이 되는 모습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제가 볼 때는 가장 적절한 형용사가 아닌가 싶고요. 또 루이스가 아주 흥미롭게도 이 표현을 썼을 때, 이 표현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나 삶의 모습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죠. 루이스가 이에 대한 강조를 또 다시 했다는 게, 이전에 쓰이던 mere라는 단어의 용례를 루이스가 기독교적으로, 아주 흥미롭게 재적용시킨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 아이디어를 제 책에서도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요한 그러니까 순전한 그리스도인에게서는 루이스가 의도했던 그 ‘순전한’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그런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상상력, 이성, 신앙이 조화를 이룬 모습이 나타난다 하는 게 교수님이 쓰신 책의 의도라고 정리해도 되겠죠?
진혁 그렇죠.
요한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본격적으로라는 말 너무 많이 하는 것 같네요. 책 1부에서는 루이스의 회심기, 기독교를 떠났다가 다시 기독교로 돌아오는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요. 저는 보면서 루이스가 두 가지 면에서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이해했습니다. 어머니와의 사별 이후에 본인이 겪은 삶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회의가 찾아오고, 그다음에 20세기 초반의 근대적 교육을 받으면서 찾아온 신앙과 이성의 대립이 루이스를 무신론자로 이끌어 갔다고 이해했는데, 그러다가 삶의 몇몇 국면에서 상상력의 전환을 맞이하는 계기들, 『판타스테스』를 읽는다던지 잉클링스의 다른 친구들과 대화를 한다던지 하면서 상상력의 전환이 일어나는 몇 가지 국면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였단 말이죠. 말하다 보니 제가 다 이야기해 버린 것 같긴 한데…아무튼, 상상력의 전환이라는 게 하나님에 대한 회의나 신앙과 이성의 대립에 어떻게 변화를 일으켰던 건지, 그리고 루이스와 유사한 경험이 오늘날 일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난다면 어떤 식으로 일어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진혁 일단 제 책에서도 강조했듯이 상상력, 이성, 신앙 이 세 가지가 다 중요하긴 한데, 상상력이 어떻게 이성과 신앙에 영향을 끼치느냐? 이게 어떻게 보면 루이스의 사상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루이스에 관한 책들은 상상력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강조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었고요. 상상력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뭐냐면, 우리가 늘 익숙하게 보던 세계 혹은 세계를 보던 방식을 전환시켜 주는 힘이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루이스 같은 경우 책을 읽고 갑자기 ‘어, 세상을 보는 방식이 바뀌었네’ 하고 깨닫게 됐고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는 걸 제가 소개했는데요. 누구나 그런 경험이 조금씩은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더 강하게, 어떤 분은 약하게 있을 수 있겠는데요. 신앙과 이성만 너무 강조하다 보면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경험 자체를, 아주 중요한 경험인데도 불구하고 그 경험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거나 파악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런 의미에서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하는 가정을 해 보고 이런 글을 쓰게 되었고요. 저도 비슷한 경험 같은 것을 했기 때문에 아마 그런 식으로 루이스를 읽게 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루이스에 대해 제가 처음으로 긍정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를 말하자면…한국에 『루이스 VS 프로이트』라고 번역된 책이 있어요. 홍성사에서 나온 책(원서는 The Question of God: C. S. Lewis and Sigmund Freud Debate God, Love, Sex, and the Meaning of Life). 제가 미국으로 막 유학을 갔을 때 그 책이 출판된 지 얼마 안 됐고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그랬을 땐데,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 루이스와 프로이트의 삶을 재구성해 놓고 있어요. 옥스퍼드의 모습을 다큐멘터리에서 비춰 주고, 그걸 보고 있는데…제가 루이스를 잘 알지 못했는데, 그리고 루이스에 대해서 미국에 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긍정적인 관심이 없었는데, 루이스 역할을 맡은 배우가 옥스퍼드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걸어가는 장면을 보고 제가 루이스를 보는 관점이 크게 바뀌었다고 할 수가 있어요. 저런 데서 저렇게 산 사람이구나, 내가 책으로 봤던 루이스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구나, 그런 저 나름대로의 경험이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루이스가 말한 상상이란 게 우리가 가진 이미지와 상당히 중요하게 결부되어 있는데…저도 제가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루이스를 봤다가, 왜냐면 저도 외국 생활을 서른 넘어서 처음 했기 때문에, 예를 들면 제가 했던 대학 생활에 기초해서 제가 늘 봐 왔던 분들 이미지를 가지고 루이스를 이해했다가, 처음으로 실제 옥스퍼드란 데서 루이스란 사람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제 루이스를 보는 상상력이 급격하게 변화되면서 루이스가 달리 보이게 된 거죠.
또 다른 하나의 경험은…대부분의 작가들이 겪는 경험이기도 한데 writer’s block이라고, 글을 쓰다가 갑자기 글이 딱 멈추는 경험이 있죠. 저도 박사 논문을 쓰다가, 잘 쓰고 있다가, 한 챕터의 마지막 장 하나를 한 문장 내지 두 문장만 더 쓰면 끝날 것 같은데 거기서 그냥 딱 멈추고 글을 더 이상 못 쓰겠는 거예요. 그 상태로 1년을 그냥 허송세월로 보냈죠. 그러고 있다가 연구원으로 독일에 가게 됐는데, 거기서 제 박사 논문 주제와 관계되어 있는 지역에 가서 나치에 의해 불탄 회당에 방문을 했던 거죠. 그 회당에 가서 불타 있는 흔적들을 보고 그날 밤에 와서 논문을 거의 다 끝냈어요. 기존에 제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 생각들이 막혀 있었는데, 실제로 그곳에 가고 그게 상상력에 영향을 주면서 제 막혀 있던 것이 풀어졌던, 1년 동안 막혀 있던 것이 순식간에 풀어졌던 경험을 하게 된 거죠. 그렇게 상상력이 변했을 때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얼마나 더 유연해지고 확장되고 교정될 수 있는지 저 역시 공부하는 과정 중에 경험을 했기 때문에, 아마 루이스가 겪었던 상상력의 세계 내지는 회심, 거기에 제가 많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요한 감사합니다. 사실 방금 하신 말씀이 다음 질문과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루이스는 옥스퍼드 영문학자로서, 어린 시절부터 지적인 여정을 걸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평생을 그렇게. 그리고 사실 그 지적인 여정이라는 게 모든 사람이 누리는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루이스가 쏟아내는 다양한 장르, 『나니아 연대기』,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등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가 여러 사람에게 각기 필요에 따라 공감을 일으키는 데는 루이스가 뭔가 인간을 이해하는 부분에서, 루이스의 깊은, 보편적인 인간 이해랄까 하는 부분이 한 몫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루이스의 인간 이해에서 주목할 바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건 사실 교수님 책 4장(이성과 도덕법)을 염두에 두고 하려고 했던 질문인데, 어쨌든 여러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루이스의 인간 이해에서 우리가 주목할 바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지 궁금합니다.
진혁 앞이랑 겹치지 않게 답을 해야 할 텐데….
요한 사실 상상력 말씀하신 것과 겹치기도 할 텐데…죄송합니다. 질문을 드린 개인적인 맥락을 이야기하면, 저는 루이스의 책 중에, 다른 책도 좋지만 저에게 짧은 시간에 큰 충격을 줬던 책은 예전에 읽었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거든요. 그 사람(악마 스크루테이프)이 자기 조카를 가르치면서, 인간은 이러이러하니까 이렇게 해라 하면서, 인간을 꼬아서 이해한 게 내밀한 부분을 자극한다 싶었어요. 『고통의 문제』 읽었을 때도 영감을 좀 받긴 했는데,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루이스가 인간의 마음이 뒤틀린 것을 이해하는 방식이 좀 탁월하다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죠.
진혁 루이스의 삶을 보면 여러 요철들이 있죠. 특별히 제 책에서 강조를 하지는 않았는데, 루이스의 삶에서 중요한 변화의 계기 중 하나는 세계대전 참전이었거든요. 아무래도 살아남아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에게 엄청난 죄책감을 안겨 주었던. 그리고 많은 전기 작가들이 얘기했듯이 루이스에게 있는 근원적인 죄책감이 루이스의 특이한 삶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데 저도 동의하는 바이고요. 루이스가 전쟁 전후에 상당히 달라진 것 중 하나는 난센스를 품는 능력이죠. 이때까지 합리주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무신론자가 되는 길을 걸었다면…전쟁이라는 것은 사실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광기와 비합리성의 극치잖아요. 거기서 이제는 합리성과는 다른 의미에서 삶을 이해하는 부분을 배웠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래서 루이스에게서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의 깔끔한 인간론이 등장하지는 않고요. 인간은 계속 역설적이죠. 무언가를 할 때 우리는 뚜렷한 목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할 것 같은데, 루이스의 삶을 보면 다 내키지 않고, 어정쩡하고, 어쩔 수 없다고 하잖아요. 그게 루이스의 인간론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금 더 말씀드리면, 루이스가 거기서 기독교적으로 접목시킨 중요한 개념이 바로 겸손이죠. 루이스가 인간의 가장 큰 근원적인 죄로 교만을 보고 그 반대로 겸손을 말했다고 신학적으로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루이스는 겸손이란 것 때문에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방식에 있어서 자신이 주도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일까에 조금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아까 말했듯이 루이스가 받은 지적인 교육이라던지, 또 옥스퍼드에 있다가 나중에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옮기게 되고, 그런 것 보면 거기서 받았던 혜택은 일반인이 누리기에는 너무나도 예외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루이스가 기독교 변증가로서, 아동 문학가로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자기가 스스로 뭔가를 계획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작심삼일 같은 것을 이겨 내야 한다며 강한 의지를 가지고 삶을 계획한 게 아니라는 데 있는 것 같아요. 루이스 삶에서는 계속해서 누군가가 ‘이것 좀 해 줘’, ‘이것 좀 해 줘’ 했는데, 루이스는 거기에 반응하면서도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나름대로 좋은 자원이 있었기 때문에 좋은 반응, 좋은 응답을 해낼 수 있었죠. 그것이 루이스 삶에서 아주 독특한 점이고, 거기서 그의 기여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어요. 만약 루이스가, 내가 그래도 옥스퍼드에서 영문학 가르치는데 하면서, 자신의 자부심을 가지고 계속 활동했다면 이런 작품들이 나오지 않았겠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루이스의 삶을 조금 더 공감적 시선을 가지고 봐야 될 게, 루이스는 자신이 계속 변증가로 알려지는 데 상당히 심적 부담이 있었던 사람이기도 하고, 이러다가 내가 영문학자로서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같이 있었다는 거죠. 말씀드렸듯이, 내가 변증가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해야지 했던 게 아니라,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 ‘내가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게 기독교 변증에 대한 글을 쓰는 거야’라고 하며 글을 쓰긴 하지만 또 동시에 거기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었다는 것, 이게 루이스의 인간론을 볼 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부분 중 하나가 아닌가 싶고요. 실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두 번째 인터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