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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할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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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글  김진혁

책<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김용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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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럴 줄 알았다."


이 짧고 흥미로운 한마디는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 묘비명의 일부다.1) 이 기묘한 표현을 대한민국의 한 재야 지식인은 대중 사이에 몇 년 전부터 몰아치던 인문학 열풍을 풍자하고자 사용하기도 했다.2) 먹고사는 데 별 도움 안 된다며 냉대받던 철학·역사·문학 등이 사실은 행복하고 교양 있는 삶을 위해 꼭 필요했다는 국가적 회개가 일어났다. 정부는 인문학 대중화 사업에 예산을 책정하고, 인문 교양서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인문학 스타 강사가 언론에 자주 등장했고, 동네 곳곳에서 대중 인문학 강좌가 열렸다. 하지만 그 바람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고 사람들의 흔들리던 마음도 조금 안정이 되자, 인문학에 대한 이러한 소비가 사실 별 실속이 없었을 뿐 아니라, 빈약했던 인문학 교육 기반을 더욱 약화해 버렸음을 반성하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난데없이 한반도를 덮쳤던 인문학 신드롬의 기세에 기독교라고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수년째 인문학적 설교, 고전 읽는 신앙인, 교양으로서 신학 등의 화두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물론 이에 질세라 반대로 '오직 성서' 혹은 '정통 교리'를 외치며 소위 세속 학문인 인문학과 담을 더 높게 쌓는 교회도 적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기독교 서점에, 독서 모임에, 오후 집회에, 성경 공부에 '인문학'이란 키워드의 등장 빈도가 늘어 갔다. 자기 힘으로는 당면한 위기를 진단하지도 타개하지도 못할 한국교회가 거듭나려면 설교자와 신학자가 인문학의 세례를 받아야 할 것처럼 선동하던 인문학 전도사들도 생겼다. 하지만 인문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인문학이 재미없고 투박한 설교와 현실에 공명하지 못하는 교리 교육의 겉모습을 화려히 꾸며 줄 장식 정도로 기능할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인문학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고조된 관심을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냉소적 한마디로 퉁 쳐 버릴 수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근원적 물음에서부터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차근차근 살피며,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기독교의 본질과 사명을 진지하게 찾아가는 일이다. 물론 이 과업을 수행하기가 실제로는 쉽지 않기에, 출판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이나 이곳저곳 이뤄지던 대중 강연에서 이 질문을 진지하게 다뤄 주는 사례를 찾기는 정작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을 부드럽고 지적인 문장으로 풀어내 왔던 철학자 김용규의 최신작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는 인문학의 풍요 속에서 역설적 빈곤을 겪던 그리스도인의 필요를 적절히 채워 주는 귀한 소책자이다.

 

신학, 하나님나라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는 머리말을 제외하고 총 15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본 서평에서는 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도록 하겠다.3) 우선 첫 5개 장은 주후 1세기 이후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이 각 시대의 대표적 인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발전해 왔던 역사적 궤적을 보여 준다. 나머지 10개 장은 현대사회의 다양한 도전에 직면해 기독교가 왜 여전히 중요하고 필요할 뿐만 아니라, 신학이 어떠해야 할지에 관한 저자의 호소력 짙은 제안이 담겨 있다.

 

이 책의 특징이자 장점은 기독교 신학에 대한 폭넓고도 특별한 정의로부터 논의가 시작한다는 데 있다. 저자가 신학을 규정하는 방식에서 왜 신학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의 원리'가 되는지도 이해될 수 있다. 서문의 한 단락을 주의 깊게 읽어 보자.

 

"나는 먼저, 기독교 신학은 지난 2000년 동안 성서의 계시와 시대의 인문학, 신앙과 이성,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즉 서로 이질적이고 때로 상반되는 둘이 만나 빚어낸 거대하고 아름다운 정신적 구조물임을 밝힐 것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 안에는 서로 대립하는 요소들의 통합과 융합을 이뤄 낼 수 있는 논리, 지식, 지혜, 경험이 쌓여 있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오직 기독교 신학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분열과 투쟁과 파국의 시대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차례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8)

 

신학을 '신에 대한 담론'이나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으로만 규정할 때는 얻기 힘든 신학의 본질과 사명에 대한 깊고 원대한 전망이 아닐 수 없다. 이질적인 두 영역의 종합으로 신학을 이해하는 저자의 작업은, 신학을 '최상의 학문'(scientia prima)으로 보며 그 언어와 논리를 통해 신앙과 이성의 종합을 추구하던 중세 신학과 닮아 보일 수도 있다. 실제 저자는 중세 라틴 신학에서 사용하고 발전시켰던 '이중적 논법',4) 즉 논리적 모순에도 양자를 통합과 융합을 가능하게 함께 사유하던 방식을 매우 중요한 방법론으로 제시한다(101~102). 하지만 저자가 신학을 '최상의 학문'이라 부르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문명에 대한 신학의 치유적·구원론적 본질과 사명에 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세속적 세상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죄와 악의 가장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요컨대 다른 어떤 학문보다 드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다른 어떤 학문보다 폭넓은 가치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학문이 그 바탕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9)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자신의 영역과 사명을 협소하게 규정하도록 근대성이 심어 준 '그릇된 겸손'(false humility)을 벗어 버리고 제일 학문으로서 자부심을 되찾아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이 철학·역사학·문학 등과의 대화 및 협력 없이 신과 세계, 인간의 문제에 답할 수 있다거나, 인문학을 적대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순수한 정체성을 지키려는 근거 없이 부풀려진 교만도 버려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은 "세상에 발 딛고 있으면서 동시에 하늘나라를 향해 뻗어 있고, 인간의 학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말씀을 다루며, 성서와 인문학을 지주支柱(버팀대)로 하여 다분히 신성하면서도 동시에 세속적인 사역을 담당"(61)한다. 이렇게,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며, 또 동시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지금도 그 속에서 활동하시고 계시는 세계에 봉사한다.

 

신학, 현대사회를 치유할 지혜

 

저자의 말대로 기독교 신학은 이질적이거나 적대적인 사상을 역사 속에서 마주할 때 "그것들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아 마침내는 자기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스스로 풍성하고 강해지는 길"(100)을 걸어온 거대한 용광로와 같다. 고대 정통 신학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플라톤주의와의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대화를 뜨겁게 펼친 이래, 중세에는 스콜라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근세에는 종교개혁 신학과 르네상스 인문주의, 근대에는 자유주의신학과 계몽철학·자연과학의 만남이 일어났다. 이러한 종합과 융합의 과정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기독교뿐만 아니라 문명에 결정적이며 지속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그리스도인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이 만남의 지층을 가식 없이 인식하기 위함이다. 또한 우리가 인정하든 않든 상관없이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만남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 만남의 과정과 결과를 긍정적으로 이끌기 위함이다.

 

한 가지 명심할 점은 역사 속에서 기독교 신학이 인문학으로부터 지적 자양분을 받으며 성장했다 할지라도, 신학은 철학이 내포한 부정적 영향을 인식하고 극복하는 방식으로 융합을 이루어 왔다는 사실이다. , 이성이 신앙에 압살당하지 않고, 또 믿음이 합리적 설명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신학은 그 내적 논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활동 사이의 신비한 '간격'을 오랜 기간 소중히 갈고 닦아 왔다. 신학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융합의 동력 속에서도 소멸하지 않는 '차이'에 대한 감각 때문에, 신학은 신 없이 인간의 능력과 계획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성취하려는 공격적인 인본주의, 혹은 인류에게 주어진 윤리적·문화적 가능성을 무시하는 천박한 신앙주의 모두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는 탈근대, 즉 포스트모던 시대에 닥쳐온 도전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학적 답변을 진지하게 시도한다. 저자는 울리히 벡, 지그문트 바우만, 유발 하라리 등 현대지성의 이론을 빌려 와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문명의 자기 파괴적 잠재력이 극도로 증대된 '위험 사회'(76), 세계화에 따라 파국으로부터 도망을 칠 수 없는 '유동하는 공포’'(79), 컴퓨터 알고리즘과 데이터 자본주의 시대의 종교인 '데이터교'(81) 등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진단한다. 그러고는 지구촌 곳곳, 학계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포스트모던 담론이 시대적 위기를 극복할 만한 지혜가 될 수 있는지, 아니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지 질문한다. 결국 이 책은 우리 힘으로는 파국을 막을 수 없어 보이는 절망적 현실로 비치는 희망의 빛을 기독교 신학이 내포한 비판적 종합과 융합의 방식에서 발견한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중략) 바꾸어 말하자면 생명, 진리, 선함, 아름다움, 정의, 위대함과 같은 전근대적·신본주의 가치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성, 계몽, 혁명, 과학, 진보, 해방과 같은 근대적·인본주의 가치들, 그리고 상대성, 다양성, 개별성, 현재서 같은 탈근대적·개인적 가치들까지 우리가 시대를 따라 추구했던 가치들을 모두 되살려 냄으로써 '온전한 가치'가 되게 하자는 겁니다." (98)

 

이것이 이 책이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기독교 신학이 오늘날에도 필요한 이유이자, 그리스도인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할 근거이다. 2000년 역사를 걸쳐 신앙과 이성을 조화와 긴장 속에서 함께 지탱해 온 신학이야말로 하나님의 샬롬으로 대변되는 인류 전체의 풍요에 대한 균형 잡힌 희망을 보존할 수 있다. 신학이 품어 온 폭넓고 유연한 전통이야말로 머리는 '하늘'을 향하면서도 '대지'에 두 다리를 굳게 디딜 수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키우는 실천적 지혜가 자라는 곳이다. 이질적 사상을 포용하며 대화의 가능성을 늘 새롭게 탄생시킨 신학의 장구한 흐름에 기대어 르네상스, 계몽주의, 후기 세속 사회를 거치면서 파편화하고 갈등을 일으키던 여러 가치가 재해석되고 조합되면서 '온전한 가치'로 거듭날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 신학과 인문학,

공존과 상생의 관계를 찾아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는 저자가 2018년 상반기에 932쪽에 달하는 대작 -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를 출간한 이후 여러 장소에서 행했던 강연 원고를 수정 보완한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루는 주제의 무게와 복잡성에 비해 이 책은 상당히 '독자 친화적'인 방식으로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풀어내고 있다. 또한 에서 충분히 담지 못했던 저자의 '예언자적'인 목소리, 즉 신학과 인문학의 비판적 협력을 통해 인류의 미래에 새로운 희망의 결을 더하자는 애정 어린 호소를 듣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물론 120쪽의 소책자에 서양 문명에서 신학과 인문학의 만남과 갈등을 소개하려다 보니, 굵직굵직하게 그려지는 궤적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여러 사상과 역사적 요인이 (저자도 스스로 밝히듯) 어쩔 수 없이 단순화하고 생략되고 있긴 하다. 또한, 이러한 지성사적 접근에서는 어떤 입장에서 어떤 자료를 선별하여 주장을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역사 이해의 척도와 미래에 대한 전망이 크게 변화할 수밖에 없는 만큼, 이에 대한 긍정적 반응과 부정적 평가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성격상 저자의 사상을 온전히 담아내거나, 주장을 받쳐 줄 논거나 사례를 상세히 제시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숙지하며 읽어 갈 필요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놓고 벌어진 오랜 논쟁을 종결 짓는 '닫힌 책'이 아니라, 둘의 관계를 창조적이고 비판적으로 보도록 독자를 초청하고 자극하는 '열려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초대 교부 시절부터 다양한 입장이 공존해 왔던 만큼, 둘의 만남을 자의적으로 규정하는 이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궤적을 통해 둘의 상호 작용을 큰 시각에서 조망하게 해 주는 것이 이 책이 품고 있는 더할 나위 없는 미덕이다. 2000년 서양 문명을 가로지르는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서 인문학을 세속 학문이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과 깊이 있는 비판적 대화에 나서고, 인문학 공부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과 함께 빚어 온 신학의 오랜 전통에 자부심을 느끼는 이들의 증언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이 작은 책 자체가 "그리스도인이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오랜 질문에 대한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답변이 되어 주고 있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조교수, 질문하는 신학(복있는사람) 저자

IVP 2019-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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