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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인간화, 성령론적 일 신학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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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슬라브 볼프 <일과 성령>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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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조성모가 하덕규의 가시나무를 리메이크해 불러 인기 절정에 있을 때였다. 한 중앙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의 취지가 지금도 생각난다. ‘저는 노래 부를 때 정말 행복합니다. 근데 그로 인해 상당한 돈까지 버니 너무 고맙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행복하게 일하면서도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은 가능한 것일까?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 중 하나일까? 이 책은 바로 그런 질문에 대한 크로아티아(구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저명한 미국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의 고뇌에 찬 씨름이요, 잠정적인 답이다. 그는 일의 인간화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중대한 사명 중 하나라고 외친다.

 


이 책을 꼭 읽어야 할 이유


첫째, 일 문제는 오늘날 그 기만적 성격으로 인해 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얼마 전 소설가 김훈까지 , 목숨이 낙엽처럼이라는 기고를 통해 매년 270-300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고층 건물 신축 공사장에서 추락사하는 것을 한탄하게 되었겠는가? 그는 며칠 후 정부가 입법 예고한 산업안전보건법 하위 법령의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 회견 자리에 참여해 해마다 노동자 2,400여 명이 노동 현장에서 산업 재해로 죽고 있다이 비극은 자본이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구조적이고 제도적이며 관행적인 사태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오늘 세계와 한국의 일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려 주는 책들을 만날 수 있다. ‘위험의 외주화균열 일터니 하는 표현들에 그 심각성이 담겨 있는 걸 파악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프의 책은 오늘 우리에게 다시 한번 생생하게 들려져야 할 아프면서도 희망찬 외침이다.

 

둘째, 바울의 기도가 잘 말해 주듯 하나님 나라의 정의로운 열매를 맺어 나가려면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나날이 풍성해져야 하기 때문이다(1:9-11). 사랑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구해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지혜와 모든 통찰력은 복잡한 삶의 현장에서 사랑과 정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과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하는가를 알려 준다. 지혜와 통찰력을 습득하려면 실천적 의지를 갖고 현실에 몸을 담아야 하고, 그 현실을 서로 다르게 분석하고 평가하는 여러 이론들을 섭렵한 후, 기독교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이 책은 그 과정과 결과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역사적 관찰, 경제 철학적·경제학적 분석, 신학적 성찰이 두루 종합되어 있다. 그러니 대부분 독자들에겐 맛난 백미밥이 아니라 다소 거친 현미밥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건강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현미밥을 먹듯이, 이 책을 인내심 있게 잘 씹어 먹을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가 지난 130여 년간 덩치는 어마어마하게 커진 반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병든 약체로 전락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백미밥에만 열광하고 현미밥을 저버렸기 때문임을 명심해야 한다.

 


소명보다 새 창조와 성령의 관점에서 본 일


볼프가 제시하는 일의 신학의 핵심 요지는 두 가지다. 첫째, 현대 사회에서는 일을 창조와 성화의 관점에서 소명으로 이해한 전통을 뛰어넘어, 새 창조와 성령의 관점에서 새롭게 성찰해야 한다. 둘째, 성령론적 일의 신학은 소외에서 해방된 일, 즉 인간화된 일이 가능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 기여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은, 앞서 언급했듯이, 사뭇 복잡하다. 우선 서론에서 매우 중요한 방향 제시를 한다. 여가와 구별되는 이란 고된 일이나 취업이 아니라 자신과 공생하는 존재들의 필요 충족을 위한 모든 수단적 활동이다. 일을 이렇게 정의할 때에야 이라는 단어가 억압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고, 모든 일을 포괄하는 보편적 신학적 고찰과 윤리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신학적으로 옳게 평가된 이란 개인의 자유, 모든 사람의 기본적 필요 충족, 자연 보호를 가능하게 하는 일이다. 그런 일이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경제 체제는 시장을 기본으로 하되 공동선의 비전에 기초한 민주적 계획으로 일정하게 규제되고 보충되는 제3의 경제 체제다.

 

1부에서 볼프는 일의 신학이 비현실적이 되지 않도록 이 시대 일의 세계를 분석한다. 1장에서는 먼저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특히 농경 사회에서 정보 사회로 진행하면서 직업적 유동성이 매우 높아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2장에서는 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를 비교하면서 현대인들이 일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분석한다. 스미스와 마르크스는 개인과 사회의 삶에서 일의 중심성에 대한 믿음을 공유한다. 그러나 일의 목적, 노동 분화, 소외에 대해서는 입장을 달리한다. 스미스에게 일 자체는 인간의 존엄성을 반영하지 않는다. 인간이 경제 활동에서 사익을 추구할 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공동선이 극대화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외는 경제적 진보와 문명화를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다. 반면 마르크스는 인간이라는 종의 특징은 목적을 갖고 의식적으로 자유롭게 일할 뿐 아니라 의식적으로 서로를 위해 일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 아래서의 일은 이에 역행하기 때문에 소외가 발생한다.


볼프는 1부를 현실적 배경으로 삼아 2부에서 성령론적 일의 신학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새 창조의 보증으로 주어진 성령 안에서의 삶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일은 성령의 영감 아래에서, 그리고 장차 올 새 창조에 비추어 행해져야 한다. 새 창조란 세상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혁시키는 것이기에 오늘의 일은 현세적 중요성만이 아니라 내재적 가치와 선함을 지니고 있다. 즉 일이란 세상의 보존과 변혁을 위해 하나님과 협력하는 활동이다. 성령은 종말론적 변혁의 현재적 능력이기 때문에 새 창조를 신학적 틀로 삼는 일의 신학은 자연스럽게 성령론적 일의 신학이 될 수밖에 없다. 성령은 은사를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심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는 일을 하게 하신다. 이러한 성령론적 일의 신학은 일을 소명으로 이해하는 루터와 칼뱅의 관점이 지닌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계승해 나간다. 일을 성령론적으로 이해하는 신학은 결코 성령을 거스르는 일의 현장을 정당화하거나 은폐하는 이념적 도구로 남용될 수 없다.

 

이러한 성령론적 일의 신학이 인간, 여가, 환경, 인간의 필요와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5장에서 설명된다. 마지막 6장은 다섯 가지 유형의 소외에 제한적으로 주목하면서 성령론적 일의 신학이 이에 대해 갖는 함축적 의미를 조명한다. 소외에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하는 이유는 마르크스처럼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보편적 해방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성령론적 일의 신학으로 보면 성경이 소외에 대해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요, 소외를 일으키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고난을 인내하는 미덕 혹은 치명적 죄성을 빙자해, 소외를 제거하고 일의 인간화와 구조적·개인적 변화를 추구하는 노력을 등한시하는 것은 기독교 경건주의의 오류다.

 

볼프가 제한적으로 주목하는 소외의 유형은 다섯 가지다. 자율성과 발전의 결여로서의 소외, 노동자가 경영진에 의해 수단으로 활용되는 데서 비롯되는 소외, 일의 주인이 디자인한 기술이 오히려 노동자를 노예화함으로 발생하는 소외, 일이 공동선에서 분리됨으로 발생하는 소외, 일이 그 자체로서 즐길 수 있는 목적성을 상실하고 상품과 서비스 구매력을 위한 필요악적 수단으로 전락할 때 조장되는 소외. 성령론적 일의 신학은 각각의 소외를 극복하고 일을 인간화시켜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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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
 



볼프의 탁월한 기여와 다소 아쉬운 한계


나는 볼프의 성령론적 일의 신학이 크게 네 가지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일에 대한 신학적·신앙적 이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일을 신학적 관심 밖의 것으로 몰아내는 경건주의적 오류를 명쾌하게 밝혀냈다. 이는 여전히 설교 시간이나 성경 공부 시간에 일 문제 같은 정치경제적 이슈를 끌어들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많은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눈을 열어 주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사회적 고정성과 보수성을 지닌 루터의 소명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효과적인 길을 활짝 열어 주고 있다.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 대다수 교인들은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순종적으로 충성을 다하는 것이 소명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 물론 소명론을 세계 변혁적인 관점에서 급진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심각하게 오염된 단어를 복원시키는 작업은 매우 어렵기에 비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볼프의 성령론적 일의 신학은 소명론보다 신학적으로 훨씬 풍성하고 종합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셋째, 성령의 은사를 따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세상 변혁에 인간이 선행적으로 협력하는 활동으로서의 일이 실현될 수 있으려면, 개인적 윤리 차원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고 경제 체제 자체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그는 한국 교회의 일반적 이해와는 달리 종말론과 성령론이 세상의 일 문제에 변혁적인 메시지를 강력하게 던질 수 있다는 점을 명료하게 보여 주었다.

 

넷째, 땅에 확고히 발을 붙이면서도 하늘의 음성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신학이 갖춰야 할 연구 방법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신학을 통해서 인간과 사회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소위 신학주의(theologism)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고, 특정 사회철학적·사회과학적·역사적 모델에 기독교 신학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사회적 실용주의의 유혹도 이겨 냈다. 그에 더해 자신의 전문성의 한계를 인식하는 겸손과 다른 견해와 입장에 대한 열린 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모든 신학적 성찰이 그렇듯이, 볼프의 탁월한 성령론적 일의 신학에도 다소 아쉬운 한계가 있어 보인다. 첫째, 그는 자본-노동 관계를 인정하는 시장 경제의 기초 위에 공동선을 반영하는 민주적 계획 경제를 부차적으로 도입하는 제3의 길을 최선책으로 제시한다. 자본주의 자체의 해체와 새로운 체제의 건설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제3의 길은 현재의 자본주의에서 일보 전진한 것이라는 점과 그 실현 가능성이 급진적 대안보다 더 크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계에 누군가 혁명적인 목소리를 냄으로써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에는 아쉬운 대목이다. 게다가 급진적 전망은 하나님의 완전함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요청이자(5:48), 고통당하는 이들의 소리 없는 절규일 뿐 아니라, 영원한 경제 체제란 없었음을 증명해 온 역사의 당위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둘째, 볼프는 마르크스의 사회철학적 노동소외론은 깊이 다룬 반면, 마르크스의 대표적 경제학 저술인 자본론에 담긴 노동착취론은 활용하지 않는다. 나로선 그의 한계로 여겨지지만 그 평가와 선택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두 입장이 현실적 차원에서 상호 보완적일 수 있다고 보는 한, 그 선택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각자의 은사와 역사적 부르심의 문제에 더 가깝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로 자본론의 사회과학적 유효성마저 소멸된 것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밝혀 두고 싶다.

 

셋째, 소명론을 비판하면서 막스 베버와 특히 리처드 토니(Richard H. Tawney)가 더 상세하게 다루었던 17세기 영국 청교도 상인 집단의 소명 이해를 다루지 않은 것 역시 아쉽다. 그들에게 소명은, 예정됨의 징표를 찾고 싶은 열망과 연결되면서, 노동자 혹은 사업가로 근면과 절제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의무로 구체화되었다. 그런 개신교 윤리적 태도가 자본주의 정신이 서유럽에 확산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게 베버 명제의 핵심이다. 그 점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면, 성령론적 일의 신학이 소명론과 연루된 소위 청부론의 영향력 아래 있는 교회들을 각성시키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지 않을까 싶다.

 

넷째, 일 문제에 대한 신학자로서의 그의 겸허함이 때로는 그를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럽게 만든 게 아닌가 싶다. 한편으론 대안적 경제 체제의 얼개를 대범하게 제시하다가도, 좀더 구체적으로 나아가야 할 지점에서 종종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신학적 이론의 영역에 머문다. 물론 일의 신학자가 사회철학뿐 아니라 경제학까지 연구해서 입장을 천명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일 문제를 다루는 신학자라면 그런 위험 부담을 안고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당연히, 1991년 이후에 발전되어 온 다양한 기독교 경제신학과의 깊은 대화와 토론이 필요하다. 특히 19세기의 고전적 기독교 사회주의 전통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무정부주의적 입장의 결합을 시도해 온 존 밀뱅크(John Milbank)를 비롯한 일군의 정치경제신학자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점에서 시급한 토론이 필요하다. 그와 약간 결을 달리하면서도 체제 전체의 변혁을 꾀하는 체계적·전면적 정치 운동보다는, 종말을 기다리며 상징적이면서 돈키호테적인 정치참여를 요청하는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도 중요한 토론 대상이다.

 

하지만 이상의 한계들은 이 책의 탁월한 특장점들에 비하면 미미할 뿐이다. 그러기에 나는 아무쪼록 이 책이 널리 읽혀, 일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성찰이 더욱 깊어지길 바란다. 그와 함께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제 체제의 변혁을 위해 적극 나서게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박득훈(성서한국 사회선교사) 



*<일과 성령> 해설을 축약, 편집한 글입니다.

IVP 2020-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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