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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종교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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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인병 

책  <문화의 신학> 폴 틸리히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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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왜 문화인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명인 폴 틸리히는 1919년 베를린 대학에서 열린 칸트 학회에서 “문화의 신학이라는 개념에 대하여”(Über die Idee einer Theologie der Kultur)라는 강연을 한다. 틸리히의 사상의 시작을 알린 이 강연을 통해 그의 삶 전반에 걸쳐 펼쳐지는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세상 밖으로 드러났으며, 여기에는 그의 초기 신학적 구상이 잘 나타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가 사망하기 6년 전에 그는 마지막 저서로 이 책 <문화의 신학>을 출간한다. 이처럼 문화의 신학은 학자로서 틸리히의 시작과 끝을 잇고, 삶과 사상을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틸리히 역시 머리말에서 “나의 글들 대부분은 기독교가 세속 문화와 관계 맺는 방식을 규명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만일 누군가 신학의 한 주제로서 “문화”를 진지하게 다루고 싶다면, 나는 주저 없이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 그리고 틸리히의 <문화의 신학> 두 권을 권할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틸리히의 신학 전반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을 하나의 대상인 존재자가 아닌 모든 존재자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이자, 존재하게 하는 힘이라고 재정의하는 존재신론, 대답하는 신학의 대표적인 방법론인 상관관계 방법, 무의미성의 위협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실존적 형식, 비존재의 불안으로부터 존재에 참여하는 용기, 그리고 문화 전반을 신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종교-문화 해석학까지 틸리히의 신학의 핵심적 주제들이 집약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로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우선 책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왜 문화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20세기는 문화의 세기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문화의 독단성을 폭로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조명했다. 다원화된 사회와 문화 속에서 일반 대중들에게 종교는 한 귀퉁이로 내몰려 종말의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되돌릴 수 없는 결말을 향해 가는 듯 보인다. 신학과 문화는 서로를 적대시하며 섞일 수 없게 서로 멀어져만 가고 있다. 틸리히는 이 책을 통해 종교와 문화가 대화할 수 있는 파트너임을 극적으로 변증하는 한 편, 신학의 방법론에 있어서 새로운 길을 마련했다. 과연 어떻게 문화와 신학이 서로를 소외화하지 않으며 어우러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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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신학>은 잘 알려진 다음의 짧은 한 구절로 요약된다.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religion is the substance of culture, culture is the form of religion)


틸리히에 따르면 “종교란 궁극적 진지함, 혹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상태(the state of being ultimately concerned) 그 자체”다. 이러한 정의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넓은 범주의 종교 개념이다. 따라서 종교는 문화의 기저에 있는 인간 정신의 기능의 실체이자 모든 궁극적 의미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종교가 외면화되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이자 형태가 바로 문화다. 이러한 종교 개념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비로소 인간의 문화적 활동의 다양한 영역 안에 있는 종교적 차원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모든 실정종교, 신화, 예술, 문학 등은 궁극적 관심과 궁극적 의미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책 속으로


틸리히의 이론의 핵심 주장은 책의 1부에 집약되어 있다. 그리고 2부에서 종교, 철학, 예술, 정신분석학, 과학, 교육 등으로 논의를 확장하여 적용하고, 3부에서는 서로 다른 문화권을 비교하며 그 심층을 분석한다. 4부는 결론적 제언으로 목회자와 교사를 향해 질문을 던지며 과제를 제시한다. 


지성사의 발전에 따라 칸트 이후에 종교는 학문적 영역에서 설 자리를 잃어 도덕적 차원에서 그 자리를 찾고자 했고, 후에는 하나의 인식의 방법으로, 미학적 측면으로, 감정의 영역으로 내몰리며 결국 주관적 감정 속에서 소멸할 위험에 처했다. 그러나 종교가 궁극적 진지함이자 궁극적 관심이라면, 종교는 단지 인간의 정신생활의 한 측면일 뿐만 아니라 필수적 측면이기도 하다. 종교는 일상의 소음에 덮여 있는 인간 정신적 활동의 깊이를 개방하며, 궁극적 용기의 원천에 대한 경험을 하게 한다. 이러한 종교적 경험은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는데, 실정종교나 신화, 예술 등이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종교와 세속 세계의 문화는 서로를 극렬히 반대하는 중에 틈이 벌어졌고, 결국 두 영역 모두에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규명한다면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갈등은 극복될 수 있다. 


틸리히는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스콜라주의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철학에서 존재론적 문제들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상세히 서술한 뒤, 존재론적 접근법이 파괴된 후에 종교 자체의 붕괴가 시작됐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주체와 객체로 분열되는 것보다 우선하며, 존재 자체인 신은 질문의 대상이기 이전에 물음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신은 존재이다”(Deus est esse)라는 명제는 모든 종교철학의 기초다. 인간은 무조건적인 것을 비매개적으로 각성(aware)한다. 이 말은 어떠한 매개가 개입하기 이전에,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 상호작용 이전에 무한정적이며 무조건적인 것, 즉 모든 존재자가 참여하는 존재의 힘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존재 자체는 단순한 존재자가 아니라, 힘을 가진 모든 것 안에 있는 힘이다. 문화적 창조물에는 존재 자체를 각성하는 궁극적 관심이 표현되어 있으며, 자율적 문화와 그것의 발전에 관한 종교적 해석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문화의 신학이다.


종교가 잊히게 된 사상적 배경이 존재론의 상실이었다면, 사회적 배경은 산업사회로의 이행이다. 산업사회에 적응하면서부터 인간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며 궁극적 목적이 결여되었다. 이러한 곤경으로부터 공허와 무의미의 경험, 비인간화와 소외의 경험이 발생했다. 이러한 현실은 전통적 용어로 말하면 인간의 타락 상태다. 이 상황에서 신적인 것에 있는 깊음의 차원이 사라졌는데, 교회는 존재의 깊이가 표현된 상징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며 초자연적 영역을 설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전통적 상징을 재해석했지만 또한 새로운 실재에 관한 소식을 상실하는 우를 범했다.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자유주의와 정통주의가 중요하지 않은 투쟁에 관여하는 동안 실존주의만이 산업사회의 정신에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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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3월 16일 타임지 표지에 실린 폴 틸리히



2부에서는 이론적인 분석을 다양한 실제적 문화에 적용하는데, 가장 먼저 종교언어의 본성인 상징에 대해 고찰한다. 상징과 기호는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지시한다는 본질적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상징은 기호와 달리 상징된 실재에 참여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이 없었다면 숨겨져 있을 외부의 실재의 수준을 개방하고, 동시에 내부의 영혼을 개방한다. 종교적 상징은 실재 자체의 깊이 차원, 다른 모든 것들의 근거가 되는 실재의 차원, 즉 존재 자체의 수준 혹은 존재의 궁극적인 힘을 개방한다. 종교적 상징은 거룩함의 차원인 궁극적 실재를 개방하여 엄청난 생명력을 갖는다. 교회 안의 성례전적인 요소들이 거룩한 것의 담지자가 되는 실재인 종교적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피카소의 작품인 “게르니카”(Guernica)를 예시로 들어 예술 양식 안에 있는 종교적 의미를 규명한다. 예술은 인간의 상황에 대한 자기 해석을 보여 주며, 궁극적 의미라는 대답을 제시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다. 7장에서는 실존철학에 대해 상세히 다루며 셸링, 키에르케고어,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니체, 베르그송, 딜타이, 야스퍼스, 하이데거의 철학에 있는 실존적 요소를 밝힌다. 실존주의가 중요한 이유는 실존이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사고와 행위가 솟아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실존은 비매개적으로 경험되는 실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종교가 비매개성을 상실할 동안, 실존주의는 살아 있는 경험인 비매개적 경험을 생생하게 보존했다. 8장에서 다루는 정신분석학 역시 실존주의와 공통적 뿌리와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두 분야 모두가 인간이 시공간 안에서 유한성과 소외의 상태로 있다는 실존적 곤경을 인간의 본성과 대조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무의미, 외로움, 공허함의 감정은 비존재의 위협으로 인해 인간이 겪는 실존적 곤경이다. 실존주의와 심층심리학에는 소외된 인간의 내적 자기파괴에 대한 묘사가 드러나고, 죄와 죄책의 문제를 다루며, 은혜와 용서와 용납의 의미를 다시금 소생시키고, 인간의 실존에 내포된 질문을 제시한다. 이 두 분야는 신학에 큰 선물을 가져다주었다고 할 수 있다. 과학과 신학에도 동일한 구조가 적용된다. 신학자들은 과학적 탐구가 덜 된 지점에 교리를 정립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자연세계의 탐구는 과학에 맡겨야 한다. 그러나 진정한 과학자 혹은 신학자라면 가장 심오한 깊이에 있는 이성의 위대함에 대한 겸손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며, 우리는 물리적 세계와 인격의 영역에서 상징화되는 초인격적 심연의 현현을 조화시켜야 한다. 유사한 논조가 10장에서 윤리를 주제로 이어진다. 틸리히는 여기에서 자율성의 함정과 타율성의 억압을 극복하는 신율적 윤리학을 말한다. 신율적 윤리란 무조건적이자, 은혜의 원천이자, 정의를 포괄하는 사랑의 윤리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윤리의 근본이 되는 자연법이자 모든 윤리의 목적이다. 


3부에서 틸리히는 미국과 유럽의 지역주의, 미국과 러시아(소비에트)를 문화적으로 비교하여 분석한다.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대학에서 10여 년 동안 가르쳤던 틸리히는 1933년 비유대인으로는 최초로 나치에 의해 교수직이 해직되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리고 약 30년간 미국에서 연구하고 가르쳤는데, 틸리히에 따르면 교회와 신학의 기능에 있어서 유럽의 위험은 수평적 현실화의 결핍이고, 미국의 위험은 수직적 깊이의 결핍이다. 우리는 지역주의를 위해 일하는 어떤 집단과도 맞서 싸워야 하고, 정치뿐 아니라 종교적 학문적 지역주의 역시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동방과 서방의 기독교를 비교하여, 동방의 정신적 실체를 서방의 인격적-사회적 형식 안에 가져가는 창조적 종합에서 새로운 연합을 찾아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틸리히는 개신교와 유대교를 비교하며 마르틴 부버의 사상에 대해 평가한다. 부버는 “나-너”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를 구별하며 예언자적 종교를 실존적으로 해석하고, 예언자적 종교 안에 있는 신비주의를 재발견했다. 정통주의와 신정통주의의 교의와 성례에서 “나-너”의 관계는 “나-그것”의 관계로 변형되었다. 도덕이나 교리, 제의의 통제로 인해 모든 곳에서 신적인 “너”는 “그것”으로 변하여 신성을 상실했다. 자유주의 역시 “그것”이 되어 버린 신에 의해 결정되는 근대적 세계관의 전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틸리히는 정통주의와 자유주의 모두에 도전하며 이를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을 나누는 이원론을 뛰어넘은 신비적 연합(unio mystica)에 대한 조명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상호관계 속에서 “나-너”의 만남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보여 준다. 종교에서도, 그리고 문화에서도 나와 너의 만남은 지속되어야 한다.


책의 마지막인 결론부에서는 목회자와 교사를 향해 기독교 메시지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질문한다. 이것은 어떻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을 수용하게 할 것인지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결단의 지점까지 이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복음은 불안과 갈등, 죄책의 구조를 보여 준다. 그리고 자신의 곤경을 이해하고 새로운 실재에 참여하여 불안과 절망을 짊어질 힘을 준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다른 것들이 걸림돌이 되지 않고 복음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결단의 지점으로 안내하여 올바른 걸림돌과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어떻게 복음을 소통하면서 잘못된 걸림돌을 제거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이 시대의 목회자와 교사들에 의해 대답되어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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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신학의 기여


교회사, 신학사, 철학사, 예술사를 넘나드는 틸리히의 논의는 놀라울 정도로 방대하면서 정교하다. 유럽과 미국의 경계, 근대와 포스트모던의 경계, 신학과 철학의 경계, 교회와 사회의 경계에 서 있는 틸리히의 사상의 자리가 이 책의 특별함을 더한다. 


문화의 신학의 가장 큰 기여는 문화의 차원에서 종교의 참된 자리를 재발견했다는 점이다. 20세기 전반의 예술적, 철학적 문화 작업은 현대문화 속 파괴적 경향을 창조적으로 표현한다. 시각예술, 음악, 문학, 건축, 철학의 위대한 작품들은 비존재와의 만남을 드러내고, 그 만남을 견뎌내면서 그것을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힘을 자신들의 양식으로 제시한다. 그 메시지의 깊이는 분명 종교적이다. 문화의 신학을 수용한다면 우리 스스로가 쌓아 온 신학의 장벽을 허물고, 신적이라 여겨 온 것들 안에 있는 세속적인 것을, 세속적이라 여겨 온 것들 안에 신적인 것들을 재발견할 수 있다. 


둘째, 틸리히는 현대문화와 종교 모두를 적절하게 비판한다. 문화의 신학은 모든 실정종교들, 특별히 분열과 대립이 멈추지 않는 한국교회에도 매우 적실한 비판점을 제시하여 교회를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틸리히에 따르면 모든 종교적 경전, 행위, 성례들은 문화적으로 외재화된 형식들이다. 이렇게 드러난 문화적 표상을 종교 자체와 동일시하여 절대화하는 것은 곧 우상숭배의 오류라고 지적한다. 교회는 끊임없이 자신의 형식을 절대화하고자 하는 욕망과 싸워야 한다. 겉모습을 두고 싸우는 모습이 얼마나 공허한 투쟁인가? 반면에 현대문화는 깊음의 차원을 상실했다. 문화적 창조물들은 상품이 되었고, 물질적 상품이 늘 그렇듯 사회의 상층 계급을 구별하는 소유물이 되었다. 문화적 상품은 좋은 시간을 갖기 위한 수단이 되었지만, 그 종교적 실체가 사라져 궁극적으로 진지한 것도, 우리를 사로잡는 존재의 신비도 사라진 채 화려하지만 공허한 모습이 되었다. 서로를 배척하며 접촉점을 잃어버린 종교와 문화를 연결하는 논의는 우선 교회를 향한 왜곡된 시선을 교정한다. 그리고 문화 역시 신학의 대상임을 보여 준다. 문화에 나타나는 상징과 메시지에는 “궁극적 관심”이라는 종교적 요소가 내재하기 때문이다.


셋째, 문화의 신학은 우리로 하여금 실천적 방향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틸리히는 유럽신학에 수평적 현실화의 차원이, 미국신학에 수직적 깊이의 차원이 결핍됐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문화의 신학을 제시한다. 이는 곧 인간 실존의 영역에서 문화가 가진 종교적 차원, 실정종교들 안에 있는 문화적 차원을 부각시켜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라는 가장 중대한 질문을 환기시킨다. 이 책은 이론-적용-분석-과제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10장 신율적 윤리학, 11장 교육의 신학, 15장 목회자와 교사를 향한 질문에 틸리히의 실천적 관심이 나타난다. 따라서 문화의 신학은 교회와 세계의 거대한 질문들이 연결되어 해결책을 찾는 작은 실험실과도 같다. 이 실험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종교는 문화에게 내몰려 한 귀퉁이에서 영원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되거나, 세속권력과 결탁하여 문화를 억압하는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이론적 깊이를 놓치지 않으며, 신학의 중요한 기능과 책무인 실천적 대안에도 관심을 두는 시도는 분명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나가는 말: 현대문화와 기독교의 화해를 향해


기독교와 현대 정신은 화해할 수 있는가? 틸리히를 수용하든 거부하든, 이 질문은 반드시 진지하게 고려하여 대답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질문을 대답하기에 앞서 문화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종교란 궁극적 관심을 가지게 된 상태다. 그리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궁극적 관심은 일차적으로 문화적 창조물인 언어로 표현되고, 모든 생활에 스며들어 사회적으로 표현되며, 따라서 문화를 창조하고 수용하는 인간 실존의 영역을 배제할 수 없다. 혹자는 실존의 의미가 세계대전 직후 서구사회만큼 현재 우리에게 급박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틸리히의 사상을 20세기 서구사상에 가두어두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다. 또 다른 문화의 물결이 우리를 향해 몰아쳐 오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과학기술 문화 역시 실존적 불안을 초래한다. 빅데이터 시대에 정보의 독점으로 빅브라더가 사회를 통제할 것이라는 불안, 과학기술이 인간을 뛰어넘고 인력을 대체할 것이라는 불안은 21세기에 새롭게 던져진 화두이며, 종교적 대답을 요청한다. 공허와 무의미, 비인간화와 소외라는 실존적 불안과 질문에 복음은 과연 어떠한 대답으로 들려야 하는가? 21세기 인간의 실존은 어떻게 복음에 참여할 수 있을까? 독자들은 이 책을 펼 때 가장 깊은 곳에서 베일을 벗고 실체를 드러내는 종교를 만날 것이며, 책을 덮을 때 새로운 문화적 상황이 던지는 질문들을 만날 것이다.



배인병 

장로회신학대학교와 독일 드레스덴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신앙은 질문하는 힘이요, 신학은 그 질문을 생생하게 보존하여 성찰하는 학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신학의 길에 정진하고 있다.

IVP 201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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