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가 성서학자에게 바라는 다섯 가지』 옮긴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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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와 성서학자의 대화”라는 기획 의도는 보통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생뚱맞게 다가갈지도 모른다. 기독교라는 범주 안에서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던 것 아니었나? 하지만 오늘날 전문화되어 세분화된 기독교 관련 분과 학문 사이에서, 경계 저편에 있는 사람들과 학술 언어로 대화하기란 쉽지 않다. 자기 분과에서 역량을 쌓기도 벅찬데 다른 분과를 기웃거리는 일은 만용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학자의 논의를 그 논의가 펼쳐지는 장에서 좀 더 대중적인 영역 혹은 교회 영역으로 옮겨 놓으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학자들의 논의는 대중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유통될 가치가 있는가? 그러니 “신학자와 성서학자의 대화”를 기획하여 출간하는 일은 여기저기서 외면받을지도 모를 위험한 시도다.
하지만 두 학자가 서로의 분과를 향해 하려는 이야기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이것이 단순히 학자들의 상아탑 놀음이 아니라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는 근본적 물음을 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책은 사실 서로의 분과를 향해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두 학자가 성경을 궁구하는 모든 독자에게 성경을 대하는 자세를 교정하길 요청하는 지침으로 볼 수도 있다. 그 강조점의 유사성과 차이를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더 성숙한 신앙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게 이번 책 출간의 궁극적 취지라 하겠다.
이하는 한스 부어스마의 『신학자가 성서학자에게 바라는 다섯 가지』 옮긴이인 차보람 신부와 서면으로 주고받은 대화다. 대개 부어스마가 쓴 책의 배경 및 내용과 관련한 질문과 답변이지만, 신학자인 옮긴이의 개성을 투영해 책의 주안점을 부각해 보고자 했다. 아울러 이 인터뷰는 1월 3일(화)에 진행할 “신학자와 성서학자의 대화” 옮긴이 북토크를 준비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신학과 성서학의 가치와 매력이 드러나길 바란다.
인터뷰이: 차보람(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사제)
인터뷰어: 설요한(IVP 편집부 간사)
Q. 한스 부어스마의 책을 신부님이 번역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두 분이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통 안에서 기독교 신앙의 원천을 회복하기를 추구하는 현대의 신학자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인데요. 옮긴이로서 저자와의 호흡이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A. 저는 배우고 공부하는 자세로 이 책을 번역했습니다. 제가 박사 과정을 밟으며 연구한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로완 윌리엄스, 새라 코클리는 정도와 수준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두 20세기 프랑스 가톨릭 신학계에서 발흥한 ‘새로운 신학’(La nouvelle Théologie)에 이러저러한 영향을 받은 학자입니다. ‘새로운 신학’은 교부와 중세의 ‘위대한 전통’ 안에 있는 기독교 신앙의 원천을 회복하고자 하는 신학입니다. 저는 박사 학위 논문 저술 막바지에 ‘성례전적 존재론’을 회복하는 신학으로서 ‘새로운 신학’을 정의하는 부어스마를 잠시 접했습니다. 부어스마의 사상을 대중적으로 해설한 『천상에 참여하다』가 번역·출간되었을 때 주저없이 대학원 과목의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천상에 참여하다』 7장과 8장은 성경과 전통의 관계 및 성경 해석을 다루는 매우 흥미로운 장입니다. 이 두 장에서 다룬 내용이 이번 『신학자가 성서학자에게 바라는 다섯 가지』에서 보다 자세하게 예증적으로 설명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번역 의뢰를 받았을 때 배우고 공부하는 기회로 삼고자, 여전히 서투르더라도 번역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조직신학자로 규정했고, 성서학 및 성경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적이 없습니다(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은 저에게도 매우 새롭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 역시 신학과 성서학의 분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로 저는 사목과 강의를 병행하면서 학자-사제 전통(scholar-priest) 안에서 신학자이면서 성직자로서 정체성을 형성해 가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례를 베풀고, 성경을 읽고 설교하며, 성찬을 축성하고 나누는 사제의 삶을 중요하게 이해하다 보니 성경 해석의 신학을 새롭게 구축하는 일이 중요해졌습니다. 자연스럽게 저의 신학적 방향인 ‘새로운 신학’ 혹은 ‘원천의 회복’(ressourcement) 안에서 성경을 바라보는 법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부어스마는 그 점에서 중요한 길잡이입니다.
Q. 책과 저자들의 배경이 흥미로웠습니다. 한스 부어스마는 네덜란드 계열의 개혁파 목회자이면서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를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현재는 성공회 사제로서 교부의 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예전에 『천상에 참여하다』 서평을 쓰시면서 이를 (로완 윌리엄스의 『과거의 의미』에서 용어를 빌려) “창조적 고고학의 모험을 감행했다”고 표현해 주셨습니다. 짝꿍 책인 『성서학자가 신학자에게 바라는 다섯 가지』를 쓴 스캇 맥나이트 역시 침례교 신앙인으로 자란 학자였지만 이제는 성공회의 학자가 되었고 유아 세례나 공동기도서를 다루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결국 두 저자의 책은 ‘신학자와 성서학자의 대화’이지만 동시에 ‘성공회 학자 간의 대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모종의 의미가 있을까요. 이를테면 ‘비아 메디아’(via media) 같은 게 있겠습니다.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부어스마와 맥나이트가 어떤 계기로 각각 개혁교회와 침례교회에서 템스강을 건넜는지는 모르겠지만, 언급하신 내용을 보면 종교개혁의 정신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보편교회의 전통이라는 원천에 더 깊이 뿌리내리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부어스마와 맥나이트가 공유하는 지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른 한편으론 성공회 학자들 사이에도 메우기 힘든 신학적 관점의 차이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커스 보그의 역사-은유적 독해와 부어스마의 성례전적 독해는 성경의 언어를 접근하는 방식에서 근본적 차이를 보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성공회 전통에서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발견하기 위해 다른 교단에서 오신 분들을 맞이하는 일을 교회에서 담당하고 있는데요. 많은 청년이 문자주의적 성경 해석을 떠나 보그의 글을 읽고 감동받아 성공회를 찾아옵니다. 하지만 아마도 부어스마는 신앙의 언어가 힘을 잃어버린 이유를 보그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찾을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은 다양성과 역동성은 제가 성공회 학자요 사제로서 학교와 교회에서 동일하게 마주하는 도전입니다.
Q. 장별 내용에 관한 질문을 또 드리겠습니다만, 그래도 먼저 이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부어스마가 그리스도, 플라톤, 섭리, 교회, 천상이라는 다섯 가지를 제시하면서 결국 하려는 주장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지금 제 머리에 딱 떠오르는 표현은 ‘뭣이 중헌디’였습니다. 신학이 성서에 기초해야 한다는 주장도, 아울러 그 기초를 제대로 다지기 위해 역사학적으로 다루자는 주장도 유의미하긴 하지만, 그래서 결국 우리는 성경 안에서 무엇을 볼 것이며 성경을 읽어서 어떻게 하겠느냐는 게 부어스마의 일관된 문제의식으로 보입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성경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공부한 더럼 대학교 신학과는 성공회신학센터와 가톨릭신학센터를 모두 보유했다는 특별한 장점을 지니고 있으며, 저는 두 연구소를 오가며 박사 학위 주제를 연구했습니다. 가톨릭 신학 석좌교수를 지도교수로 두고 가톨릭신학센터 장학생으로 활동하면서 옛 가톨릭 신학교를 자주 방문하면서도, 성공회 사제로서 성공회 대성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성공회 신학 석좌교수와 공부했습니다. 제가 둘 사이에서 긴장이나 갈등보다는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며 연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두 교단 모두 전례독서, 신앙고백, 성찬기도를 통해 신앙을 표현하고 성경을 읽는다는 점입니다. 전례독서는 신약이 감춰져 있는 구약과 구약을 성취하는 신약은 모두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해석과 잘 어울리고, 니케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부터 계시는 참하나님이라는 신앙을 고백하며, 성찬기도는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고백합니다. 이 모든 교회공동체의 예배 안에서 성찬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성례전이듯, 성경 또한 부어스마의 말대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성례전입니다. 부어스마가 지향하는 성경의 성례전적 해석은 성례전적 신앙을 가진 교회의 전례적 예배에 잘 녹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고백이 때로는 신약성경에 앞서 있으면서 성경의 저술 자체를 견인하며 자연히 이후 성경 해석을 이끌고, 이러한 성경 해석은 다시 신앙고백의 발전을 이끌어 갑니다. 부어스마가 말한 이 “해석학적 순환성”은 교회의 삶을 잘 드러내 준다고 생각합니다.
Q. 1장, “그리스도가 없으면 성경도 없다”를 보면서, 특히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하거나 발견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풍유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자는 말이냐는 조롱조의 비난을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형론으로 읽는 방식도 눈총을 받는 마당에 풍유라니. 물론 부어스마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면서 아타나시오스, 이레나이우스 같은 고대의 교부나 앙리 드 뤼박 같은 현대의 학자를 가져옵니다.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한다는 것, 그리고 (부어스마의 말처럼) 성경(Bible)은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성례전으로 기능할 때 비로소 거룩한 책(Holy Scripture)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앞선 질문에 대한 답변과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기대했던 내용과 사뭇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현대 조직신학과 현대 성서학의 결합을 시도한다거나 현대적 사유에 적합한 일종의 신학적 성경 해석학을 새롭게 제시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현대인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해석학, 모형론과 풍유를 변명하지 않던 ‘위대한 전통’의 해석학으로 우리를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이 해석학에 따르면, 모세는 불붙은 떨기에서 야웨로 자신을 드러내는 분을 만날 때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며, 우리는 예배 안에서 이 말씀을 들을 때 모세와 함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예수는 주님(야웨를 뜻하는 칠십인역 용어)이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모세가 만난 그분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부어스마는 이 “예수는 주님이다”라는 고백이 구약성경의 기독론적 해석을 떠받치는 근간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똑같은 분으로 영원부터 선재하시며 세상이 창조된 원리인 말씀과 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 안에서 이미 세례를 주고 성찬을 나누고 성경을 읽으면서 교회는 무엇이 정경이 되어야 하는지 확정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교회는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과 임재를 누리는 성례전적 수단으로 성경을 읽었으며, 성경이 우리에게 여전히 기독교의 경전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여전히 이와 연결되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앙리 드 뤼박의 ‘새로운 신학’에서 은총과 자연의 내재적 연결과 성경과 그리스도의 성례전적 연결이 나뉘지 않는다는 점을 살피는 일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입니다.
Q. 2장 제목 “플라톤이 없다면 성경도 없다”는 그 표현 자체로 도발적입니다. 부어스마의 책에 서문을 쓴 맥나이트조차도, 기본적으로 신학에는 호의적이지만 ‘플라톤이 중요하다’는 말에는 끝내 갸웃거리는 뉘앙스를 내비칩니다. 어떤 학자는 기독교의 헬라화를 주장하거나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또 어떤 학자는 그러한 시각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와 플라톤(혹은 그리스 철학)의 관계에 관한 신부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메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모쉐임(Johann Lorenz von Mosheim)을 따라 하르낙은 “기독교의 헬라화”를 주장했고 이후 이 역사적 주장은 여러 현대 신학자의 대전제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개인의 내적 성품과 공동체의 윤리적 지향성으로 읽은 하르낙의 논의는 칸트와 슐라이어마허의 철학적·신학적 주장을 역사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직신학적으로 보자면, 하르낙 이후 신학자들은 무로부터의 창조와 하나님의 수난불가능성 등 고전 신학의 핵심 개념들을 히브리 성경의 역동적 신인 관계가 그리스 철학의 추상적 신 개념으로 대체된 불행한 왜곡의 결과라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헤셸부터 몰트만을 거쳐 맥페이그와 켈러에 이르기까지 하르낙의 영향은 직간접적으로 실로 지대합니다(우리는 플라톤 철학의 영향은 의심스럽게 바라보면서도 헤겔과 하르낙의 영향에 대해서는 관대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 신학의 대전제에 대한 변화의 흐름이 또한 깊게 흐르고 있습니다. 로버트 윌켄은 『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에서 초기 기독교 사상의 발전은 기독교의 헬라화라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기독교화에 더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플라톤주의에 좌절하고 기독교로 이행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들도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아가페의 에로스화’보다는 ‘에로스의 아가페화’에 가깝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안데르스 니그렌의 아가페/에로스 이분법도 재고될 필요가 있습니다. 앤드루 라우스는 『서양 신비사상의 기원』에서, 기독교 신학에 미친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당연히 무시할 수 없지만 오히려 기독교 신학의 출발과 발전은 플라톤주의의 극복으로 읽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부어스마도 앙리 드 뤼박을 따라 교부들의 풍유적 성경 해석에서 플라톤주의의 영향보다는 그리스도 중심성이 더 근원적이고 근본적이라고 주장합니다. 로완 윌리엄스도 초기 교회의 사상사를 헬라화에 의한 기독교의 왜곡이 아니라 “성경과 철학의 창조적 종합”으로 읽습니다(초기 교회와 하르낙에 대한 윌리엄스의 강연을 번역하여 소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플라톤주의의 관계를 ‘위대한 종합’으로 읽는 관점이고,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삶과 사상으로부터 둘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이제는 하르낙 테제에서 벗어나서 위대한 전통의 유산을 보다 창조적으로 사유하는 조직신학을 전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한 가지를 더하자면, 플라톤 형이상학을 꺼리는 현대인들은 많은 경우 중립성의 오류를 범합니다. 실은 이미 특정한 방식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따르면서도 자신에게는 형이상학이 없다고 착각하는 오류가 근대성의 세례를 받은 우리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는 성경 해석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부어스마는 말합니다.
Q. 4장에서 부어스마는 “성경을 읽는 주된 영역은 학계가 아니라 교회”라고 말하며 ‘공동체에서 성경 읽기’를 강조합니다. 공동체에서 성경 읽기. 표현은 좋아 보입니다만 사실 이 정서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꽤 있을 것 같아요. 특히 공동체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겠고요. 하지만 유구한 교회 전통에서는 공동체적 읽기가 중요하게 취급되어 온 것 같습니다. 공동체적 성경 읽기란 게 무엇이기에 그랬던 건지, 근대 이후에도 혹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현실 가운데서도 유효한지, 어떤 식으로 유효한지 궁금합니다.
부어스마는 성경은 처음부터 ‘교회의 마음’으로부터 읽혔다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을 겁니다. 먼저, 성경은 교회의 신앙고백 안에서 읽힌 책이라는 뜻이 있을 겁니다. 사도신경은 세례 서약의 고백이기에 “나는 믿나이다”로 시작하고 니케아신경은 보다 더 보편교회적 고백이기에 “우리는 믿나이다”로 시작하지만, 이러한 신앙고백들은 나라는 개별자의 자기주장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을 함께 고백하며 공동체의 친교로 진입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교회는 성경을, 내가 내 성경을 가지고 내 방에서 나 홀로 머리로 읽은 게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성경을 가지고 우리의 공간, 즉 예배 안에서 다른 이의 몸을 통해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통해 읽었습니다. 또 전례가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적 행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성경은 공동체의 전례 안에서 함께 읽는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 읽기의 공동체적 차원은 신앙고백으로나 물리적 환경으로나 예배적 차원으로나 그리스도인에게 처음부터 자연스럽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론 설교자도 신자들도 여러 이유로 성경을 홀로 읽고 공부하며 연구하고 묵상하지만, 이 모든 개인적 차원은 공동체적 차원으로부터 흘러나오고 흘러 들어간다고 봅니다. 덧붙이자면, 성경을 해석하는 일은 나 홀로, 개인의 능력과 지식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에티오피아 고관에게 빌립의 설명이 필요했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의 설명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선한 형태의 권위에 대한 의존은 교회의 삶에서 핵심 요소입니다.
Q. 데이비드 베빙턴이 복음주의의 4요소 중 하나로 ‘행동주의’(activism)를 꼽을 정도로, ‘행동’은 복음주의 개신교를 구성하는 데 필수 요소였습니다. 꼭 복음주의로 한정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와 확산되는 데는 ‘행동’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외적으로 확연히 나타나기도 하고요. 그래서 정작 부어스마가 책 5장에서 기독교 전통의 핵심이라 강조하는 ‘관상’(contemplation)은 뭇 한국 개신교 신앙인들에게 생경할 것 같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교부를 포함해 앙리 드 뤼박,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새라 코클리 등 가톨릭과 성공회의 주요 신학자를 연구해 오신 만큼 이에 대해서도 고민해 오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관상이란 무엇이며, 오늘날에 어떤 면에서 중요하고 유효할까요?
관상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플라톤주의에서 관상이라는 주제는 인간이 처한 매우 상반된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먼저 인간은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존재이며, 이 육체적 차원에서 일자를 관상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한편으론 영혼은 일자와 질적으로 “동족 관계”(라우스의 표현입니다)에 있어서, 영혼은 일자를 순수하게 관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플라톤주의의 참여 존재론을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의 관상은 점차 플라톤주의의 이 두 가지 상반된 인간의 상태를 매우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먼저 인간은 언제나 체화된 영혼 혹은 영적 육체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육체성과 물질성은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성육신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방식이 됩니다. 또한 영혼은 하나님이 인간 안에 거하는 차원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동족 관계에 있지는 않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이후로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를 통해 기독교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존재론적 차이, 질적으로 무한한 거리를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이와 거리로 인해서, 또한 인간의 물질성으로 인해서, 인간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상승의 운동은 영원한 여정이 되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를 ‘에펙타시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몸을 입고 있는 인간은 시간 속에서 끊임없는 정화와 치유, 성숙과 성장의 과정을 겪으며 하나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관상은 플라톤주의에서처럼 순간적 탈아가 아니라 시간적 과정이 됩니다. 물론 여기서 활동과 덕은 관상과 그 자체로 대비되지 않습니다. 영혼의 거울을 닦는 내적 행위도 활동이고 가난한 이를 돕는 외적 행위도 활동이며, 활동은 관상과 상호 내재합니다. 부어스마가 5장에서 활동에 앞선 관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미 우리의 신앙 논리가 관상과 활동을 내세성과 현세성으로 구분하고 니체를 따라 내세성을 무시하거나 내세성에 마땅한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이른바 진보 신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해방신학 논의에서도, 그리고 복음주의 신학자라 저자들의 논의에서도 동일한 경향이 발견된다고 부어스마가 지적하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Q. 스캇 맥나이트의 『성서학자가 신학자에게 바라는 다섯 가지』의 옮긴이이신 성서학자 정은찬 박사님과 두 책 및 관련 주제를 두고 대화하는 북토크 시간을 갖습니다. 이러한 대화의 과정을 통해 부각되길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아직 맥나이트의 책을 읽을 기회를 갖지는 못했습니다만, 이 대화를 통해서 예배 안에서 성경을 읽는 방법, 성경과 전통의 관계, ‘오직 성경’의 원리 등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독자들이 얻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성경과 전통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와중에 종교개혁을 겪기도 했습니다. 종교개혁 500년이 지난 지금, 개신교회에 속한 많은 이는 보편교회의 전통을 새롭게 사유하고 있으며, 가톨릭교회는 성경과 전통과 교회의 관계에서 성경이 교도권을 인도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보편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며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에 이 대화가 작은 기여를 하길 바랍니다.
차보람
경희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철학을,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Th.M.)을 공부하고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성직(M.Div.)을 준비했다. 이후 영국 더럼 대학교에서 가톨릭신학센터 장학생으로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로완 윌리엄스, 새라 코클리를 연구하여 2020년에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세례교리교육 담당사제로 사목하면서 성공회대학교 학부와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며, 세계성공회 신학교육 위원회에서 활동한다. 로완 윌리엄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앙리 드 뤼박 등을 다룬 논문을 썼고, 『바다의 문들』(비아)을 한국어로 옮겼다.